[신년특집]형평운동 100주년[1]형평탑이 세워진 땅 진주
[신년특집]형평운동 100주년[1]형평탑이 세워진 땅 진주
  • 임명진
  • 승인 2023.01.01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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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인권 외친 100년 전 횃불, 형평운동을 돌아본다

불과 100여 년 전의 일이다. 최하층민의 삶은 비참했다. 출생에서 사망에까지 전 생애에 걸쳐 신분에 따른 억압과 차별이 존재했다.

호적에 그 이름을 올리지 못했고, 교육기관에도 다니지 못했다. 일반인과의 혼인도 할 수 없었고 억울한 일을 당해도 법적, 사회적 보호도 받지 못했으며 신분은 세습되어야 했다.

조선말인 1894년 갑오개혁이 일어나고 공식적으로 수천년간 이 땅에 이어져 왔던 신분제가 폐지됐다. 하지만 그 잔재는 쉽게 없어지지 않았다.

그들의 삶은 여전히 천대받았다. 일반인과 어울릴 수 없었고, 그들만의 거주지를 만들어 따로 살아야만 했다. 사람들은 그들을 ‘백정’이라 불렀다.

<목차>
1. 형평탑이 세워진 땅, 진주
2. 예배당의 가림막
3. 형평사를 창립하다
4. 반형평, 기울어진 저울
5. 신백정이라 불린 사람들
6. 다시 써야 할 형평
7. 사람사는 세상 진주

 

 

◇한국 최초의 인권운동

진주시 칠암동의 경남도문화예술회관 앞 남강둔치에는 독특한 모양의 조형물이 서 있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써 있다.

1923년 4월 24일 이 곳 진주에서 ‘저울처럼 공평한 사회’를 만들고자 한 선각자들이 모여 형평사를 창립하였다. 형평사는 각지의 성원에 힘입어 전국 조직으로 자라면서 1935년까지 평등 사회를 이루려는 활동을 펼쳤다. 멸시와 천대에 시달리던 백정들과 그들의 처지에 공감한 분들이 힘을 모아 펼친 형평 운동은 수천 년에 걸친 신분 차별의 고질을 없애려는 우리나라 인권 운동의 금자탑이다. 누구나 공평하게 인간 존엄을 누리고 서로 사랑하며 사는 사회를 만들자던 형평 운동의 높은 이상은 오늘날 아직도 이루지 못한 인류의 꿈으로 남아 있어서 그때의 운동이 더욱 돋보인다. 이제 70여 년 전 어둡고 힘겹던 시절에 거룩한 인간 사랑의 횃불로 타올랐던 형평 운동의 정신을 드높여 기리고 아름답게 꽃피울 수 있기를 바라면서 뜻있는 분들의 열의와 정성을 모아 유서 깊은 진주성 앞에 이 탑을 세운다.
-1996년 12월 10일 형평운동기념사업회

조선에서 가장 천한 신분이었던 백정, 그들의 가장 간절한 소망을 담아서 만든 단체가 ‘형평사’다. 백정들이 고기의 무게를 잴 때 항상 사용하는 저울처럼 공평한 세상을 만들어 가자는 뜻이 담겨 있다.

‘형평사’라는 이름에는 차별에 시달려 온 백정들의 애환이 깃들여져 있는 것이다. 평등한 세상을 호소했던 이들의 투쟁을 훗날 사람들은 형평운동이라 한다.

1923년에 조직된 형평사는 일제강점기 동안 단일 조직으로 가장 오랫동안 유지된 사회운동 단체로 기록되고 있다.

또한 우리 역사상 최초로 인간 평등을 주장하며 특정 집단에 대한 차별 관습을 없애기 위해 활동한 인권 단체로 평가받고 있다.

김중섭 경상국립대 사회학과 명예교수는 “형평운동은 전통적인 신분 질서를 무너뜨리고 평등한 근대사회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일어난 역사”라면서 “차별과 억압의 시대에서 벗어나 평등과 인권이라는 미래 사회의 비전을 제시한 사회운동이었다”고 말했다.

◇왜 진주에서 시작되었을까

형평운동이 진주에서 시작된 이유에 대한 답은 간단치가 않다.


당시 진주에 백정들이 특별히 많아서도 아니고, 차별이 타 지역에 비해 극심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다만 여러 대내외적 상황을 고려했을 때 진주에서는 형평운동의 발생과 연관 지을 수 있은 일련의 사건들이 끊임없이 이어졌다는 점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당시 조선은 외세의 침략과 함께 1862년의 진주농민항쟁과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겪으면서 기존의 봉건적 신분질서가 무너지고 있었다.

신분에 대한 사회적 차별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평등 사회의 조짐도 조금씩 보이고 있었다는 것이다.

신진균 형평운동기념사업회 학술위원장은 “진주에서 백정의 신분 차별 철폐를 위한 크고 작은 사건이 이어지면서 다른 지역에 비해 백정의 목소리가 좀더 강하게 형성되는 발판이 된 것 같다”고 분석했다.

진주에서 있었던 사건으로는 1900년 2월에 있었던 백정들의 집단 청원 사건을 들 수 있다. 황성신문의 1900년 2월 29일자 지면에는 ‘진주 인근 16개 지역 백정들이 차별관습을 없애달라며 관찰사에게 탄원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백정들의 집단 청원은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차별의 부당함에 지금껏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백정들이 이를 적극적으로 개선하겠다며 실천에 옮긴 사례다.

당시 백정들은 신분 차별 금지 등을 요구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복장을 갖추고 호적에 이름을 올릴 수 있도록 요구했지만 이같은 요구가 알려지자 진주사람 수백여 명이 백정들의 거주지를 쳐 들어가 폭력을 행사하고 집을 부수는 일이 발생했다.

하지만 진주의 백정들은 이에 굴하지 않았다. 1909년 진주교회 백정 동석 예배, 1910년의 도축조합 설립 시도 등의 백정과 연관되는 사건들이 계속해서 발생했다.

분명한 사실은 세상이 바뀌어 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부당한 차별대우에 조금씩 저항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는 백정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마찬가지였다. 1919년 3·1만세운동을 기점으로 진주지역에는 청년, 소년, 농민, 여성 등을 위한 다양한 사회 단체들이 활동하면서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진주에서 평등한 세상을 꿈꾸는 ‘형평사’라는 단체가 만들어 졌다. 형평사는 1923년에 결성돼 1935년에 대동사로 명칭이 바뀔 때까지 존속했다.

임명진기자 sunpower@gnnews.co.kr

<형평의 기억>“형평운동 100주년…차별 없는 세상 만들어야”

이곤정 형평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은 “형평운동은 백정들의 신분차별 철폐로 시작됐지만 일제치하 독립운동, 소년운동, 농민운동과 교육운동까지 전국으로 확장됐고 보편의 평등권을 구현하자는 인권운동으로서 우리 현대사의 소중한 경험의 첫 시작”이라고 정의했다.

기념사업회는 형평사 창립 70주년을 맞은 1992년에 진주지역의 뜻있는 인사들이 주축이 돼 창립했다. 발족된지 30여 년이 지나 그동안 인권운동의 상징 조형물인 형평운동기념탑 설립, 형평사 관련 유적지 정비와 관리, 형평 유적답사 행사 등을 정기적으로 실시해 왔다.

그는 “형평사가 창립된 매년 4월에는 국내의 전문가들의 초청해 인권 관련 특별 강연회를 개최하고 시민과 학생을 대상으로 답사 프로그램 등을 정기적으로 운영하고 있으며 경남교육청과 함께 인권교재를 개발해 일선 학교에 보급했다”고 밝혔다.

2023년 ‘형평사 창립 100주년’이라는 뜻 깊은 해를 맞아 기념사업회는 형평운동 100주년 추진단을 꾸리며 대대적인 준비에 나섰다. 100주년 특별 전시와 형평운동 국제 학술대회, 인권 단편영화제, 형평 연극 등 다양한 행사가 마련될 예정이다.

이 이사장은 “100년이 지난 지금 세상에는 백정이란 계급은 없지만, 지금도 여전히 사회 곳곳에선 성별과 직업, 인종, 지역 등의 또 다른 이름으로 차별이 존재하고 있다”면서 “소외받고 외면당하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한발 더 다가가 함께 손잡고 세상 속으로 나갈 수 있도록 다양한 형태의 사업을 전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임명진기자 sunpower@gnnews.co.kr

이곤정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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