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포럼]새겨야 하나, 말아야 하나
[경일포럼]새겨야 하나, 말아야 하나
  • 경남일보
  • 승인 2023.01.03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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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희복 진주교대 명예교수
송희복 진주교대 명예교수


자신의 전문 지식은 말하지 않고 TV에 출연해, 광우병에서 이태원까지 정치적인 발언을 하면서 화면에 얼굴을 새기는 교수들을 보면, 남명 조식이 생각난다. 그는 당시의 행정 구역인 진주의 끝자락에 살았다. 지리산이 잘 보이는 곳이었다. 실제로 지리산에 가 보니, 암벽에 새겨진 이름들이 여기저기 있었다. 자기 이름을 남기려는 헛된 욕망을 가리켜 ‘날아가 버린 새의 그림자만도 못한’ 행위라고 꾸짖었다.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새기지 말아야 할 곳에 새긴 이름이여. 조식은 젊었을 때 김대유의 청도 집을 방문해 열흘간 머문 일이 있었다. 그보다 무려 스물두 살 연장자인 김대유는 자신의 스승에 다름없었다. 조식이 김대유의 청도 집에 머물 때 김대유를 위해 5언 14행의 형태가 특이한 찬양시를 썼는데, 중요한 부분은 인귀서벌로(人歸西伐路), 강주남하백(江注南河伯) 두 행이다. 대체로 이렇게 번역된다. 사람은 서쪽으로 향한 길을 가고, 강은 물의 신이 있는 남으로 흐르네. 어쩔 수 없는 오역이다.

정확한 뜻은 이렇다. 서쪽은 수도를 상징한다. 고중세의 중국 수도인 함양·낙양·장안이 중국에서도 서쪽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는 관습적으로 서행(西行)과 상경(上京)이 동의어로 쓰였다. 한양으로 향하는 길 ‘서벌로’ 는 벼슬을 하고 싶은 욕망이다. 근데 하백(河伯)은 누구나 물의 신으로 안다. 한자 백은 대체로 세 가지로 독음된다. 백·패·맥이다. 즉, 맏 백, 우두머리 패, 논밭사이길 맥이다. 여기에서는 두 번째인 ‘하패’에 해당한다. 하패는 물의 우두머리인 낙동강을 가리킨다. 울산에서 발원한 청도의 동창천은 남하해서 밀양강을 경유해 낙동강으로 흘러들어간다. 이 낙동강이 물의 우두머리인 것이다. 선비라면 누구나 벼슬을 하고 싶은 욕망에 귀의하겠지만, 강물은 이에 개의치 아니하고 남쪽의 낙동강을 향해 흘러간다.

김대유 집안의 후손인, 창원 출신의 김종영은 우리나라 추상조각의 선구자이다. 그는 조각을 두고 ‘불각(不刻)의 미’라고 했다. 비유컨대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다. 새기지 아니한 새김의 아름다움이라. 눈부신 역설이다.

새겨야 할 때 새기고, 새기지 말아야 할 땐, 새기지 말아야 한다. 근래에 이어진 재난인 세월호·코로나·이태원은 끊임없이 새겨야 하고 되새겨야 할 성찰의 기표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 이 기표를 은근히 속내에 감추면서 즐기는 어두운 세력도 있다. 정치적인 이해득실에 따라, 새김질하고, 되새김질하곤 한다. 정치를 텅 빈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세상. 지금과 같은 가치의 무정부 상태에서, 이 탈진실(post-truth)의 시대에서, 가짜 재난인 광우병마저 ‘대안 사실’이라고 쉽게 인식한 사람들은, 이제 내게, 내 편에 유리한 것만 믿으려고 한다. 이제 해가 새로 바뀌었으니, 생각도 바뀌어야 한다. 공익이라면 새겨야 하고, 무슨 저의가 있다면 새기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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