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특집]형평운동 100주년 [2]예배당의 가림막
[신년특집]형평운동 100주년 [2]예배당의 가림막
  • 임명진
  • 승인 2023.01.08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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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얼 선교사 "교회에서 신분의 차별이 있어서는 안된다"
1909년 진주교회에서 백정 교인과 일반 교인들이 함께 예배를 본 백정 동석 예배 사건은 당시 이 땅에서 살아가던 백정들이 처한 좌절과 희망을 단적으로 보여준 상징적인 사례다. 신분 때문에 같은 교인이라도 함께 예배조차 볼 수 없었던 당시 시대 상황에서 그 장벽을 허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 이 사건을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다.
 
진주교회 정문에는 형평운동 90주년을 맞아 2013년 4월에 진주교회와 형평운동기념사업회가 지역 최초로 백정교인과 함께 예배를 본 역사적 사실을 기념하는 표지판을 세웠다.


◇평등사상의 교회에서도 빚어진 신분갈등

진주교회는 1905년에 진주를 비롯한 지금의 서부경남지역에 최초로 설립된 교회이다. 호주 장로회 소속 선교사 커를 부부가 당시 경남의 도청소재지인 진주에 들어와 열악한 의료시설과 선교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교회를 세웠다.

의사 출신인 커를 선교사는 선교 활동뿐만 아니라 의료 봉사활동과 학교를 세우고 여성 교육사업에도 뛰어들었다. 유교적 질서가 엄격했던 당시 사회에서 성별과 신분 등을 따지지 않는 서구식 평등사상을 기치로 내건 교회는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진주교회는 진주성 내 북문 근처에 있던 초가에서 출발했지만 이듬해인 1906년 11월에는 규모를 좀 더 확장해 대안동으로 이전했다.

그러다 1916년 6월에는 옥봉리에 교회를 신축했으며 1933년에는 지금 위치인 봉래동 부지로 다시 이전했다. 백정 동석 예배 사건이 불거진 시기는 1909년의 일이므로 대안동 진주교회 시절이다.

이처럼 진주교회는 외국인 선교사들의 노력으로 설립한 지 불과 4년 만에 교인들의 수가 400여 명에 달할 정도로 교세가 크게 확장된다.

 
 
문제는 여기서 출발했다. 그 중에는 15명의 백정 신도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진주의 백정들은 진주성 밖에 그들만의 집단 거주지에서 따로 생활하고 있었다.

조헌국 진주교회 장로는 “1909년 당시 진주교회의 신도는 남녀 포함해 400여 명에 이르고 학생들도 70여 명에 달해 남녀로 두 번에 나눠 주일예배를 드렸다”면서 “백정 교인들은 다른 장소에서 선교사나 교회에서 보내준 인도자에 의해 예배활동을 했다”고 말했다.

외국인 선교사들은 백정 교인들에게도 전도를 했지만 신분의 차이에 일반 교인과 함께 교회에서 예배를 보지 못하고 그들의 거주지에서 따로 예배를 진행해야 했던 것이다.

사실 이는 진주교회만의 상황도 아니었다. 백정과 기독교가 만난 것은 진주보다 앞선 1892년의 서울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 선교사 무어 목사는 백정 박성춘을 치료 받을 수 있도록 도왔는데, 박성춘은 이 일을 계기로 교회에 나가게 된다.

하지만 일반 신도들이 백정과 함께 예배를 볼 수 없다며 크게 반발하면서 박성춘은 3년이 지난 1895년에서야 정식 세례를 받았다. 박성춘은 백정의 신분으로 1898년 서울 종로 거리에서 독립협회가 주최한 만민공동회에 참가해 “나는 비록 천민이지만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의 뜻은 안다”며 대중들 앞에서 애국충절의 연설을 했다.

 
대안동 시절의 진주교회의 모습. 성탄 축하를 위해 교회에 많은 등이 달려 있다.
◇라이얼 목사의 도전과 교회의 ‘파란’

박성춘 사건이 있은 지 10여 년이 지난 진주에서는 설립자인 커를 목사가 안식년을 맞아 1908년 고향인 호주로 떠났다. 이듬해인 1909년 4월 라이얼 목사가 새로 부임했는데, 그는 교인들이 따로 예배를 보는 것을 불편하게 느꼈다.

라이얼 목사는 일반 교인들에게 “교회에선 신분에 따른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며 백정들과 함께 예배를 볼 것을 제안하게 된다. 신임 목사의 뜻밖에 제안에 일부 찬성하는 교인도 있었지만 대다수의 교인들은 “조선의 풍속과 관습에 비춰 백정들과 같이 예배를 볼 수 없다”며 강한 거부의사를 나타냈다.

김중섭 경상국립대 사회학과 명예교수는 “당시 교인들은 외국의 종교를 받아들일 정도로 어느 정도 새로운 문화에 대해 개방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 조차도 현실적인 신분 차별의 장벽까지 한꺼번에 뛰어넘는 것이 정말 쉽지 않은 일이라는 점을 보여준 것”이라고 했다.

라이얼 목사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백정 교인들에게 교회에 나와 함께 예배를 볼 것을 거듭 권하자, 마침내 5월 9일 일요일 백정 교인 15명이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진주교회에 모습을 드러냈다. 백정 교인들이 등장하자 200여 명의 일반 교인들은 함께 예배를 볼 수 없다며 교회 밖으로 퇴장해 버렸다.

일부 남은 교인들이 목사와 면담을 하며 중재에 나섰지만 라이얼 목사는 단호했다. 진주교회가 설립되고 4년여 만에 맞은 최대 위기였다. 100년 역사가 넘는 진주교회의 연혁사에는 당시의 상황을 ‘교회의 처음 파란’이라고 적고 있다.

 
백정 동석예배 사건을 ‘교회의 처음 파란’이라고 기록한 1930년 진주교회의 연혁사.
◇켈리·스콜스의 설득과 ‘동석예배’

진주교회의 백정 예배 동석사건은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에도 언급이 될 정도였다. 진주여고 출신인 박경리 작가는 토지를 집필하면서 시대 상황에 맞게 진주교회의 백정 동석 예배 사건을 다뤘다. 다만 토지 소설에는 백정들이 교회가 둘로 나뉘는 대립 끝에 49일 만에 피눈물을 뿌리고 물러났다고 적고 있다. 이는 당시 진주교회의 연혁사에 동석 예배가 실현되지 못한 것으로 잘못 기록됐기 때문이다.

조헌국 장로는 “1930년에 쓰인 진주교회의 연혁사에는 동석예배가 이뤄지지 않은 것으로 기재돼 있었는데 나중에 선교사들이 본부에 보낸 편지와 보고서가 발견되면서 백정 동석예배가 평화적으로 이뤄졌음이 확인됐다”고 설명했다.

이들의 중재에 결정적 역할을 한 이들은 라이얼 목사보다 먼저 진주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켈리와 스콜스라는 두 여성 선교사들이었다.

조선말에 상대적으로 능숙했던 여 선교사들은 적극적으로 화해를 시도했다. 두 달여간 양측이 따로 예배를 보며 대치하던 와중에 먼저 물러선 쪽은 백정 교인들이었다.

그들은 일반 교인들이 다시 교회에 나올 수 있도록 자신들이 본래의 예배장소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백정 교인들이 돌아가자 일반 교인들도 두 달여 만인 7월 25일에 교회로 돌아왔다.

일반 교인들은 자신들이 다시 교회에 나올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준 백정 교인들의 결정에 큰 호의를 느꼈다. 그들은 7월 29일 목요일에 전체 회의를 열고 백정 교인들과 함께 예배를 보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8월 1일 진주교회에서 일반 교인과 백정 교인들이 처음으로 함께 예배를 보게 되는 기념비적인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진주교회 백정 동석 예배사건은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진리를 새삼 확인하고 백정도 다른 사람과 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했다. 이는 14년 후인 1923년 진주에서 ‘형평사’라는 단체가 만들어지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했다.

임명진기자 sunpower@gnnews.co.kr

 
대안동 시절 진주교회를 방문한 호주 사람들이 말을 타고 있는 장면.
<형평의 기억>

“만인의 평등 일깨워 준 역사적 경험”

조헌국 진주교회 장로

 
조헌국 장로
“교회에서부터 신분 차별이라는 오래된 벽을 무너뜨린 역사적 경험이었습니다”

조헌국(75) 진주교회 장로는 백정 동석예배 사건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전직 진주교육장 출신인 그는 오랜 시간에 거쳐 진주지역의 교회 역사와 외국인 선교사들의 역할에 대해 연구하고 저술활동을 펼쳐 왔다.

조 장로는 “당시 교회에서도 이 사건을 ‘교회의 처음 파란’이라고 적을 정도로 매우 엄중하게 바라보고 있었다”면서 “사태 해결에 기여한 켈리와 스콜스 두 여선교사는 적극적인 중재 노력으로 여전도회연합회와 해외선교회로부터 감사장까지 받았다”고 했다.

백정 동석예배 사건은 한동안 교회의 연혁사에 백정 교인들이 본래의 자기들 예배소로 돌아간 것으로 마무리 되면서 동석 예배가 이뤄지지 않은 것으로 기록됐다.

조 장로는 “1930년대에 기재된 연혁사에는 백정 동석 예배가 실패한 것으로 기록됐지만 켈리와 스콜스 두 여선교사가 1909년 7월과 8월에 본부에 보낸 보고서가 나중에 발견됐다. 여기에는 백정 동석예배가 양측 간의 타협으로 성공했다는 사실을 구체적인 경과와 함께 소개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특히 백정과 일반교인간에 처음에는 전통을 뛰어넘지 못하고 분열과 갈등을 겪었지만 결국은 서로를 이해하고 화합하는 과정에 주목했다.

조 장로는 “양측이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면서 동석예배가 실현됐다는 점에 큰 의미가 있다”면서 “훗날 진주에서 일어난 형평운동이 백정 뿐만 아니라 각계각층의 지지를 받는 근대 사회운동으로 성장해 나가는 큰 발판이 됐다”고 평가했다.

임명진기자 sunpower@g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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