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기 논설위원
그 때는 희망이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국회의원 소선거구제 이야기다. 제13대 총선을 불과 한 달 앞둔 1988년 3월 국회의원선거법이 개정되면서 중선거구제가 폐지되고 소선거구제가 다시 도입됐다. 소선거구제는 이후 30년 넘게 한국 정치의 근간을 유지하고 있다. 유권자가 후보자 1명만 선택해 투표하고 후보자 중 최다 득표자가 선출되는 단순다수대표제 형식이다. 오늘날 소선거구제는 승자독식과 지역구도 고착화의 망국적인 선거제도로 뭇매를 맞고 있지만, 당시로선 한국정치의 새로운 희망으로 떠올랐다. 소선거구제는 ‘여야동반 당선’ ‘나눠먹기식 제도’ 같은 적폐제도로 비판받았던 중선거구제를 대체할 만한 획기적인 선거제도로 평가됐다. 한국정치의 폐해로 지목됐던 ‘유신정치’를 청산하는 의미로 인식되기도 했으니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정치는 생물임을 다시 한 번 보여주는 대목이다.
선거구제 개편이 새해 정치권의 화두로 떠올랐다. 어젠더를 선점한 쪽은 야당이 아닌 윤석열 대통령이었다. 대통령은 신년 언론 인터뷰에서 “소선거구제는 전부 아니면 전무로 가다보니 선거가 너무 치열해지고 진영이 양극화되고 갈등이 깊어졌다”며 “중대선거구제를 통해 대표성이 좀 더 강화되는 방안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덧붙여 “지역특성에 따라 2명, 3명, 4명을 선출하는 방법도 고려해 볼 수 있다”는 대안을 제시하면서 군불을 지폈다. 여기에다 김진표 국회의장도 때마침 2월까지 각 정당에 선거법 개정안을 내달라고 요청하며 선거구제 개편에 힘을 실었다. 야당으로선 선점기회를 놓쳐선지 뜨뜻미지근하지만 대놓고 논의를 외면할 수 없는 처지다 .
문제는 또 있다. 과연 중대선거구제가 승자독식과 지역주의 기반의 양당 정치구도를 해소하는 대안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다. 오히려 특정 정당의 의석독점을 고착화하는 역효과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2006년부터 기초의원 선거에 중대선거구제를 도입했으나 지역구도 해소는 여전히 난망하다는 평가 때문이다. 이를 반영하듯 역대 정권들은 빠짐없이 소선거구제의 폐해를 지적하면서 선거개혁을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정치개혁이라는 총론에 공감하나 현실정치의 벽을 넘을 수 없었고 효과에 대한 확신이 부족했던 탓이 크다.
그렇다고 30년이 지나도록 변하지 않는 소선거구제의 문제점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다. 어떤 형태로든 개혁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상적인 최선의 방안만 찾는데 몰두할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차선책을 도출해 내야한다. 이상적인 최선책은 어쩌면 존재하지 않는 방책일지 모른다. 여소야대 정국 속에서 내년 총선을 통해 주도권을 잡겠다는 발상에서 대통령이 던진 화두일지언정 대다수 국민들이 바라는 양극단의 진영 및 지역구도 혁파를 위해서는 넘어야 할 과제다. 승자독식, 지역구도 고착화, 진영의 극단화 같은 악성 정치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치열한 토론과 논의가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작심하고 법정시한(4월 10일) 안에 소선구제와 헤어질 결심을 해야 하지만, 생색 또는 시늉만 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소선구제의 단물만 기대할 것이 아니라 역사적 소명의식을 갖고 영호남 현역 의원부터 선거구제 개혁에 앞장서 줄 것을 당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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