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특집]형평운동 100주년 [4]반형평, 기울어진 저울
[신년특집]형평운동 100주년 [4]반형평, 기울어진 저울
  • 임명진
  • 승인 2023.01.24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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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기생·백정 억압받던 사람들은 왜 서로 싸웠나
1923년 4월 25일 백정들을 위한 형평사가 창립됐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백정에 대한 신분차별을 당연시 여긴 반대 세력들은 창립대회와 축하식을 지켜보면서 노골적으로 반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기존의 질서를 지키려는 이른바 ‘반형평 움직임’이 일어난 것이다.

◇조직적 반대운동…동지가 없었다

그 시작은 놀랍게도 같은 천민으로 분류되는 기생들이었다. 진주기생조합은 형평사의 창립 축하식이 열린 5월 13일 공연을 요청받았지만 “백정들 앞에서 공연할 수 없다”며 이를 거부했다.

신분상 차별을 당하긴 기생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기생들이 공연 거부에 나선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1년여 전, 대구에서 기생들이 백정들 앞에서 공연을 한 일이 크게 문제가 됐다. 대낮에 백정들의 행사에서 공연을 한 기생들에게 엄청난 비난이 쏟아졌다. 그 일로 대구의 기생조합은 분노한 사람들을 달래기 위해 공연에 참가했던 기생들을 조합에서 제명시키는 초강수를 취했다.

신진균 형평운동기념사업회 학술위원장은 “대구의 사례가 선례로 남아 혹시나 백정들 앞에서 공연을 하게 될 경우 받게 될 불이익을 우려해 진주 기생들도 형평사의 축하 공연을 거부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고 말했다.

천민인 기생들조차 주변의 시선 때문에 축하공연을 거부할 정도로 형평사의 창립은 이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기존 세력들의 거센 저항에 직면하게 된다.

형평사가 창립되고 나서 한 달여 뒤인 5월 24일 진주에서 보다 구체적인 반대 움직임이 포착된다. 진주지역 24개 동리의 농민단체인 ‘농청’ 대표자들이 당시 중안동사무소에서 만나 형평사에 반대하기로 뜻을 모은 것이다.

그날 밤 수백여 명의 사람들이 ‘형평사 공격, 새 백정 강상호, 신현수, 천석구’라고 쓴 깃발을 들고 시위를 벌이면서 반형평 움직임이 본격화됐음을 알렸다.

다음날인 25일부터는 소고기 불매운동이 시작됐다. 마을마다 2명씩 감시조까지 정해가며 백정들이 운영하는 가게에서 소고기를 사먹지 못하게 막았다. 심지어 백정 가게에서 구매한 소고기를 사용하는 음식점까지 불매운동의 대상이 됐다.

◇“형평사를 돕는 자도 백정”

형평사 창립에 따른 반 형평 움직임은 예상 못한 바는 아니었다. 1900년 백정들의 집단 청원 사건, 1909년 진주교회 동석 예배, 1910년 백정들의 도축조합 결성 시도에 이르기까지 이를 반대하는 움직임은 늘 있어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강도가 달랐다. ‘농청’ 대표자 70여 명은 26일 진주의 의곡사에 다시 모였다. 이들은 △형평사에 관계하는 자는 백정과 동일한 대우를 할 것 △소고기를 절대 사먹지 말것 △진주청년회에 형평사와 관계 맺지 못하게 할 것 △노동단체에 형평사와 관계 맺지 못하게 할 것 △형평사를 배척할 것 등 5가지 사항을 결의했다.

눈길을 끄는 건, 이번에는 백정을 돕는 사람과 단체까지 표적으로 겨냥했다는 점이다. 형평사와 관계를 맺거나 돕는 자도 백정처럼 대우하겠다는 방침은 백정들에게 호의적인 사람들에게 큰 위협으로 다가왔다.

반대세력은 농민단체인 ‘농청’을 앞세워 조직적으로 형평사의 활동을 방해했다. 형평사 창립 활동을 돕다 새 백정으로 낙인이 찍힌 강상호, 신현수, 천석구의 집과 가게에 돌을 던지고 위협하는 일까지 서슴치 않았다.

이상한 소문까지 나돌며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일부 인사들이 돈을 받고 형평사 창립에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진주노동공제회 간부들도 형평사를 옹호해준 대가로 돈을 받았다는 소문이었다.

형평사 창립에 우호적인 인사와 단체를 대상으로 괴소문이 나돌자 진주의 사회단체들은 그 배후에 일부 지주를 비롯한 수구세력들이 있다고 보았다.

진주노동공제회는 지주에 대항해 소작운동을 이끌어온 단체다. 소작운동에 반감을 가진 그들은 형평사와 진주노동공제회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을 유포시키며 농민들을 선동한 것이다.

김중섭 경상국립대 사회학과 명예교수는 “3·1운동 이후에 진주지역의 사회 개혁 세력에 대한 기존 세력의 불만이 있었다. 그들은 형평사 창립을 기회로 농민들의 감정을 자극해 사회운동 단체에 대한 반대로 확대하려 했다”고 말했다.

◇구타·만행 속에도 형평 불씨는 전국으로

반형평 움직임에 진주 전체가 들썩거렸다. 수백여 명의 사람들이 형평사 반대를 외치며 돌아다녔고, 형평사에 관계한 이들은 신변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불안감에 떨었다.

형평사 회원들도 자체 결사대를 조직해 대항에 나서면서 곳곳에서 충돌사태가 빚어졌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진주의 사회단체들은 형평운동에 지지의사를 천명하고 농청 등을 대상으로 적극적인 중재에 나섰다. 특히 소작농민들과 친밀했던 진주노동공제회의 설득은 효과가 있었다.

김 명예교수는 “사회단체들은 형평사에게는 결사대를 해체하고, 농민들에게는 형평사 반대 활동을 멈춰 달라고 설득했다”며 “지역사회의 거듭된 노력으로 한 달여 만인 6월 중순께 종지부를 찍게 된다”고 설명했다.

반 형평 움직임은 비교적 큰 사고없이 마무리됐다. 이는 진주지역의 여러 사회운동가들과 시민들의 적극적인 지지와 협력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백정 집단청원, 교회 동석예배, 도축조합 결성 시도 등의 일련의 사건들을 차례로 경험하는 동안 진주지역에는 평등 사회를 지향하는 형평사 활동에 적극 참여하거나 지원해 주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이 그만큼 많았기 때문이다.

형평운동은 거센 반대 활동에도 굴하지 않고 전국 곳곳에 뿌리를 내리게 된다. 형평사 창립과 함께 그해 전국 곳곳에 80여 개의 지사를 설립했는데 지역마다 분쟁이 발생했다. 폭력의 수위도 높아지면서 6월 초에는 울산에서 형평사 회원 구타사건이 발생했으며 9월 4일 충북 제천에서는 수백 여 명의 반대세력이 형평사원들을 공격해 목에 줄을 매어 시내거리로 끌고 다니는 만행을 자행했다. 형평사가 창립된 1923년에만 전국에서 형평운동에 반감을 가지고 충돌한 사건이 17건이다. 이후 1929년에는 68건, 1930년에는 67건에 달하며 극성을 부렸다.

임명진기자 sunpower@gnnews.co.kr


[형평의 기억]신진균 형평운동기념사업회 학술위원장
“형평의 가치는 보편적 인권…계승해나가야”


“100주년인 올해 형평의 날을 다시 되살려야 합니다.”

신진균 형평운동기념사업회 학술위원장은 “형평사 창립 100주년을 맞아 ‘형평의 날’을 국가지정 기념일로 지정하는 지역사회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형평사는 창립 이후 매년 4월 25일을 ‘형평의 날’로 지정하고, 형평의 날에 즈음한 4월 24~26일 사이에 형평사 전국대회를 개최해 왔다.

신 학술위원장이 ‘형평의 날’ 지정에 강한 의지를 보이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는 진주가 가진 형평이라는 훌륭한 자산을 어떻게 기념하고 계승시켜 나가야 할지, 고민해야 하는 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해야 할 의무라고 했다. 형평의 날 지정은 그 최소한의 의무라는 것이다.

현재 4월 25일은 국민에게 준법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지정한 국가지정 기념일인 ‘법의 날’이다.

그는 “형평의 가치는 보편적 인권이라는 영원히 지켜나가야 할 미래의 가치”라면서 “100년 전 진주에서 있었던 형평운동을 기념하는 노력이 지역사회에서 보다 활발하게 일어났으면 한다”고 말했다.

임명진기자 sunpower@g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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