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특집]형평운동 100주년 [5]신백정이라 불린 사람들
[신년특집]형평운동 100주년 [5]신백정이라 불린 사람들
  • 임명진
  • 승인 2023.01.31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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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평은 사회의 근본이기에…백정 비백정의 동행

 

백정의 반대말은 비백정이다. 형평사의 창립과 전국적 확산은 이들 비백정들의 지지와 도움이 없었다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양반 출신에다 또는 재력가로 아쉬울 것 하나 없는 이들이 ‘새 백정’이라는 주변의 비아냥과 지탄을 받아가면서 사회의 가장 낮은 계층인 백정을 위해 헌신한다는 것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백정과 비백정 ‘모두가 사람’

진주지역 비백정들의 형평운동에 대한 관심과 지지는 1923년 5월 13일 옛 진주극장에서 열린 형평사 창립 축하식에서도 알 수 있다.

축하식에는 진주지역의 사회 활동가들이 대거 참석했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강달영(1887~1942) 선생이다. 그는 진주에서 3·1운동을 이끌었으며 그 일로 18개월 동안 투옥됐다. 이후 노동운동에 적극 참여했으며 1926년 6·10만세운동을 추진하다 일경에 체포돼 다시 징역 6년형을 선고 받았다. 민족주의자이면서도 사회주의 노선을 걸어 제2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를 역임했다.

다른 진주의 사회 활동가들도 형평운동에 적극적인 지지를 보냈다. 강대창, 조우제, 이진우 선생을 비롯한 이들은 진주청년회, 진주노동공제회 등의 단체에서 노동과 소작, 교육 등의 다방면에서 활동했다. 형평사 창립대회가 1923년 4월 25일 사람들이 많이 찾는 진주청년회관에서 열릴 수 있었던 것도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김중섭 경상국립대 사회학과 명예교수는 “3·1운동에 참여한 경험을 바탕으로 진주지역에서는 다양한 분야에서 사회 활동가들이 적극적으로 활동했으며 형평사 창립에 큰 기여를 했다. 진주지역의 반형평 움직임이 큰 사고 없이 마무리된 것은 이들의 중재 노력이 컸다”고 설명했다.

형평사 반대세력들은 백정이 아니면서 형평사에 동조한다는 이유로 여러 활동가들 가운데 강상호, 신현수, 천석구 선생의 이름을 특정해 거리에서 ‘새 백정 나와서 소 잡아라’고 외쳐대며 위협하기도 했다.

이들이 반형평 세력의 목표가 된 이유는 형평사 창립 과정에 있어 활동이 두드러졌기 때문이다. 4월 25일 형평사 발기총회 때 비백정 출신으로 임원진에 이름을 올렸고, 5월 14일 형평사의 전국 확대 추진과정에서도 정희찬, 장지필, 이학찬 선생과 함께 본사 위원으로 선임됐다. 임원진의 구성에서 비백정들이 형평사 창립 과정에 얼마나 지대한 역할을 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강상호 선생

 

◇강상호 신현수 천석구, 앞장 선 비백정

강상호(1887~1957) 선생은 ‘형평운동의 아버지’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양반 출신에 천석꾼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부친은 당시 도청소재지인 진주시의 대안면장을 지낸 강재순씨다. 강상호, 강영호, 강신호씨 등 형제 3명이 형평운동, 아동 운동가, 경남 최초의 서양화가 등으로 빼어난 활동을 했다.

강상호 선생은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벌어지자 경남회를 결성해 적극적인 모금활동을 벌였다. 진주에서 3·1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일경에 체포돼 6개월간 옥살이를 했다. 이후 동아일보 초대 진주지국장을 지냈으며 형평사 발기총회에서는 임시의장을 맡았다. 1924년에는 진주에 있던 도청이 부산으로 이전하려고 하자 도청이전 반대운동을 벌인 혐의로 또다시 일경에 구속됐다. 1927년에는 신간회 진주지부의 간사로 활동했다. 진주시 가좌리 주민의 호세를 10년간 대납해주는 등 지역에서 활발하게 사회활동을 했다.

신현수 선생

신현수(1893~1961) 선생은 진주에서 큰 한약방을 운영하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3·1운동에 참여한 것이 계기가 돼 사회활동에 관심을 가졌으며 1922년 선배인 강상호 선생을 찾아 백정 조직 창립을 논의하고 ‘형평’이라는 이름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형평사 본사가 서울로 이전한 뒤에도 진주파 인사들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천석구 선생은 당시 시장에서 화산상회라는 큰 지물포 가게를 운영했으며 진주자작농회 등의 여러 사회단체에 이름은 올려져 있지만 뚜렷한 활동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일각에서는 생업 때문에 사회운동가로 전면에 나서 활동하기 보다는 이들의 활동을 뒤에서 지원하는 후원자 역할을 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신진균 형평운동기념사업회 학술위원장은 “강상호 선생은 동아일보 진주지국장, 신현수 선생은 조선일보 진주지국장을 지내 당시의 정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지식인에 속했다. 그들은 일제 식민지배라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계몽과 교육에 답이 있다고 여겨 학교 설립 등 교육사업에 열중했다”고 설명했다.

강상호 선생의 부친 강재순 선생도 대안면장을 지낼 때 지금의 봉래초등학교의 전신인 봉양학교를 설립했다. 신현수 선생은 유치원과 보통학교, 야학설립에 힘을 쏟았는데, 1932년에 현 망경동 주민들이 기금을 모아 지금의 망경초등학교 부근에 선생의 덕을 기리는 송공비를 세울 정도로 존경을 받았다.

 
 
형평사본부사람들, 뒷줄 오른쪽부터 이학찬, 강상호, 맨왼쪽 장지필
◇일본 유학 간 백정…절실한 신분해방

백정출신으로 형평운동에 뛰어든 인물로는 장지필(1882~1970년대 중반) 선생이 대표적이다. 의령 출신인 그는 백정의 신분으로 일본 메이지대학 법대로 유학까지 간 그야말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의 부친 장덕찬 선생은 1900년 진주에서 백정 집단청원사건을 주도했으며 아들인 장지필 선생은 1910년 진주의 도축조합 결성을 시도하는 등 부자가 대를 이어 백정 신분해방 운동에 뛰어들었다. 장지필 선생은 형평사의 핵심 간부로 활동하다 1926년 고려혁명당사건으로 투옥됐다. 1928년 석방 이후 1935년까지 형평사 운동을 지도하며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다.

이학찬 선생은 진주 출신의 백정이다. 형평사 창립 발기인·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중앙시장에서 정육점을 하고 있는 젊은 백정들을 이끌고 형평운동에 참여했다. 그 외에 강상호 이웃에 살던 정찬조 선생도 형평사 결성에 적극 참여한 인물이다

형평사는 일제의 탄압으로 1935년 명칭이 대동사로 바뀌면서 막을 내리게 된다. 형평운동이 그동안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이유는 대동사가 친일 단체로 전락해 버렸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일부 인물들의 친일 논란이 불거졌다.

오늘날 형평운동을 연구하는 관계자들이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부분이 바로 이점이다. 형평사는 대동사로 이름을 바꿀 때까지 12년간 존속하면서 일제침략기에 가장 오랫동안 존속한 사회운동 단체로 남아 있다. 온갖 역경 속에서도 차별에 저항하고 보편적 인권존중의 사상을 실천하려고 노력한 형평사와 활동가들의 발자취는 제대로 평가받아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다.

임명진기자 sunpower@gnnews.co.kr

 
맨 오른쪽이 장지필 선생
 
진주시 새벼리 길가에 있는 강상호 선생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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