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춘추]우함양의 상징, 일두 정여창의 민생복지론
[경일춘추]우함양의 상징, 일두 정여창의 민생복지론
  • 경남일보
  • 승인 2023.01.31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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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웅 경상국립대학교 명예교수
강신웅 경상국립대학교 명예교수


‘좌안동 우함양’의 내력은 흔히 뼈대 있는 고장에 쓰는 말로 통한다. ‘좌안동’은 낙동강 동쪽 안동으로 훌륭한 유학자들을 많이 배출한 지역이고, 낙동강 서쪽인 ‘우함양’은 뛰어난 인물들이 많이 태어났던 지역으로 전해온다.

이러한 ‘우함양’의 기틀이 된 사람은 조선 성종 때 문신으로 안의 현감을 지냈던 일두 정여창이다. 정여창(1450~1504)은 판전농시사 정복주 아버지로, 함길도병마우후였던 정육을의 아들로 함양 개평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김굉필과 함께 김종직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했는데, 특히 논어에 밝았고 성리학·도학사상에도 심취했었다.

34세 때 사마시를 통해 진사가 돼 예문관검열로 근무했다. 37세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3년 동안 시묘(侍墓)를 행한 뒤 하동 악양동 섬진나루에 집을 짓고 살았다. 그러나 성종은 정여창의 사직상소문에 대해 ‘경의 행실을 듣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고 쓰고 사임을 허락지 않았다. 1490년 12월 벼슬이 올라 세자(후에 연산군)에게 강론하는 시강원설서를 지낼 만큼 학문의 우수성을 인정받았다. 1494년 안음현감에 제수된 후 정치가 맑아져 백성들의 칭송이 그치지 않았다. 즉 연려실기술 ‘무오당적’에 보면 "안의현감으로 있던 시절 공무의 여가에 그 고을에서 총명한 제자들을 뽑아, 서재를 지어 거처케 하고, 친히 가르쳐 일과로 강독을 하게하니 학자들이 듣고 먼 데서도 찾아왔다…정사가 깨끗하니 백성들이 모두 기뻐했다”라고 돼 있다. 또 정여창은 530여 년 전에 이미 현대의 복지정책을 실천했음을 알 수 있다. 원거리에 거주하거나 형편이 어려운 유생들을 위한 기숙사와 일종의 장학제도에 따른 교육시설 구축과 오늘날 노인복지체계와 유사한 행사들을 실행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소요되는 경비 일체는 당시 현감 본인이 받고 있는 일종의 판공비인 치계미로 충당했다. 유선록에 의하면 그는 손수 ‘편의수십조’라는 세법을 만들어 당시 형편이 매우 어렵거나 노약자 집안들의 세금부담을 줄여주기도 했다고 전해온다. 이와 같은 그의 민생 및 교육복지정책은 당시는 물론, 오늘날에도 보기 드문 민생복지정책이라고 볼 수 있다.

정여창의 학문과 덕행 그리고 민생과 교육복지 실천의 행장과 공적은 2019년 7월에 ‘한국서원 9개’ 중 하나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현 함양군 수동면에 위치한 남계서원에 소롯이 남아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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