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춘추]영남(嶺南) 선비론
[경일춘추]영남(嶺南) 선비론
  • 경남일보
  • 승인 2023.02.21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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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웅 경상국립대학교 명예교수
강신웅 경상국립대학교 명예교수


고려조까지는 한강 이남을 지정학적으로 기호와 삼남지방으로 구분했다가 조선조에 들면서 영남과 근기, 호서 호남지방으로 분류하고 조선 성종 때는 영남이 좌안동과 우함양으로 나눠졌다. 특히 우함양 지방에는 특출한 인물, 진정한 충절과 풍류가 넘치는 선비가 많이 났었다고 전한다.

조선 후기 실학자인 이중환의 택지리 ‘영남지방은 장군이나, 재상이 될 만한 재주 있는 사람들이 많이 태어난다’라고 했다.

또 조선 과거 합격자들의 명부인 사마방목에는 ‘영남 출신 과거합격자들이 많았으며, 그 결과 조선조 한 때 우함양의 중심지인 진주지방은 나라의 인재를 공급하는 보고라고 불릴 만큼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고 나온다. 심지어 ‘조정 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고, 그 반은 진주에 있다’라는 말도 있었다

아울러, 조선 정조 때 대사간을 지낸 윤행임이 전국 각도의 도민성을 사자성어로 풀이하면서 특히 영남 도민을 ‘태산교악(泰山喬嶽 : 태산보다 무겁고), 설중고송(雪中孤松 : 눈 바람속의 소나무처럼 절개가 굳다)’으로 표현했다.

문헌과 기록들로 미뤄 영남인은 지정학적으로 일찍이 정통 선비로서의 기질을 타고난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기질은 이미 800년대 말 통일신라시대의 최치원이 함양 태수 재직시 그의 ‘현묘지도’사상의 영향을 비롯, 고려 말 두문동72현의 한 사람인 덕곡(德谷 1357)의 진정한 불사이군 정신, 조선조 성종 초에 함양 군수를 지내고 당시 사림의 대표 격이었던 점필재의 도학사상이, 이후 영남 일원의 일두(1450), 퇴계(1501), 남명(1501), 구암(1512), 내암(1536)등에까지 전수됐다. 그들이 전수받은 그들의 충절과 도학사상이 영남선비사상의 바탕이 됐으며, 이것이 끝내 영남 선비론의 뿌리로 정착됐다고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영남 선비론의 구체적 컨텐츠를 정리해보면 ‘영남인은 태산교악, 설중고송이며, 평소 언쟁은 몹시 요란하되 그 속내는 매우 정직하고 단순하며, 외대(겉으로는 담대하고 거만해 보인다)하나, 내허(내면은 매우 여리고 자상하다)하다. 때로는 ‘오기가 강하다고 하지만 사실은 매우 결백하며. 또 어떤 때는 무모할 정도로 직행성’이다. 끝내는 ‘외유내강한’ 사람들로 평가돼 왔다. 상기와 같은 영남지역 선비가 향후 어떻게 평가될지는 모르나, 이와 같은 영남인의 선비적 기질과 성향이 조선조 500여 년의 한때를 풍미했었던 특별한 사조라고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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