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재남의 포엠산책(91)정물화(홍일표)
강재남의 포엠산책(91)정물화(홍일표)
  • 경남일보
  • 승인 2023.03.12 15:3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물화(홍일표)
 

 

연못이 거위를 번쩍 들었다 놓는다

날아가지 못하는 거위의 일생이 주르르 흘러내린다

물에 띄워 놓은 한 덩이 두부처럼
거위는 후회하지 않아서 다시 거위가 된다

연못을 잠그고
물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새와 거위 사이가 멀어져서 날이 저물었다

창문이 많은 봄이었는데
들길 산길에 색색의 기분들이 흘러 다니는 봄날이었는데

 


---------------------------------------------------------------------------------
 

그럼요. 그런 날이 있었어요. 들길 산길에 색색의 기분이 흘러 다니는 봄날을 보던 거요. 봄의 안색을 가진 창문들은 구속되지 않은 생기로움으로 가득했어요. 그때 나는 젊었고 자유로웠죠. 시간이 영영 내 것인 줄 알았어요. 이제 봄은 하나씩 창문을 없애고 박제된 삶을 택해요. 수채화 같던 생이 유화로 덧칠되어요. 그럼에도 갑갑한 느낌이 없으니 이 또한 편안한 삶인가 보아요. 젊은 날을 다 보낸 내가 고즈넉한 노년을 맞고 싶은 거예요. 이렇게 ‘정물화’를 거꾸로 읽었어요. 정지된 삶을 먼저 보았고요. 날개가 있어도 날지 못하는 거위가 보였어요. 거위에게 무한의 자유를 주었어요. 한 덩이 두부처럼 살 기회를요. 하지만 거위는 안온한 삶이 좋다고 해요. 그런 거위에게 타성에 젖지 말라 질책할 생각이 없어요. 새였다는 사실을 망각한 거위처럼 나도 많은 걸 잊고 싶거든요. 잊을 일과 흘려야 할 일을 잘 챙겨서 보내야 한다는 걸 알아요. 그러하기에 연못이 세상이고 자유인 거위를 이해하기로 해요. 일생이 저물어 정물화가 되면 어때요. 색색의 생을 다 살고 돌아와 거기 가만히 있고 싶은 내가 거위라는 걸 알겠는데요.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경상남도 진주시 남강로 1065 경남일보사
  • 대표전화 : 055-751-1000
  • 팩스 : 055-757-1722
  • 법인명 : (주)경남일보
  • 제호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 등록번호 : 경남 가 00004
  • 등록일 : 1989-11-17
  • 발행일 : 1989-11-17
  • 발행인 : 고영진
  • 편집인 : 강동현
  • 고충처리인 : 최창민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지원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 경남, 아02576
  • 등록일자 : 2022년 12월13일
  • 발행·편집 : 고영진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gnnews@gnnews.co.kr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