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의 고문헌 [7]찾아가는 고문헌 도서관 상담
경남의 고문헌 [7]찾아가는 고문헌 도서관 상담
  • 경남일보
  • 승인 2023.03.13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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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민 찾아 고문헌 상담 하는 이유
지역 곳곳 나의 선조 살아온 이야기
비석 하나·정자나무 한 그루도 사연
“발굴하지 않으면 모두 돌덩이·폐지”
고문헌도서관에서는 고문헌과 관련한 지역민의 궁금증을 해소해 드리기 위해 고문헌 상담을 하고 있다. 지역민이 직접 고문헌을 들고 사무실로 찾아오기도 하지만, 때로는 담당자가 직접 현장을 찾아가서 궁금증 해소를 돕기도 한다.
 
신당리 정자나무와 유래비
◇신당리 정자나무와 유래비

마을 입구에 정자나무 한 그루 없는 마을이 드물다. 그러나 그 나무를 언제 누가 심었는지, 그 나무를 심은 의도와 역사가 기록된 문헌이 전하는 정자나무는 매우 드물다. 주로 수형이나 크기, 마을 원로의 증언을 바탕으로 나무의 나이를 추정하고 그것을 그 나무의 역사로 알고 있다. 전 경남도청 공무원인 석주환씨가 마을에 큰 정자나무가 있고, 그와 관련된 비석이 있는데 그 내용을 알고자 도움을 청했다. 위치는 집현면 신당리이다.

정자나무는 신당리 마을 입구에 있고, 곁에는 작은 비석이 서 있다. 비문 내용 요지는 다음과 같다.

“집현면 신당리에 몇백 년 된 구불구불한 큰 나무 한 그루가 있었고, 그 곁에 맑은 샘물이 솟고 있어 마을 사람들의 휴식처로 사랑 받았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 때 왜인이 배를 만드는 재료로 사용하겠다며 이 나무를 강제로 베어갔다. 나무를 베어가자 마을 사람들과 가축은 시름시름 병에 걸려 죽어 나갔다. 마침 이 마을에 사는 석윤홍(1857-1927)이라는 분이 이를 안타깝게 여겨 정자나무 한 그루를 구하여 심고, 정성껏 보살펴 오늘에 이르렀다. 마을 사람은 이 정자나무와 샘을 보호하기 위해 규천정계를 조직하여 근래까지 운영해 오고 있다. 당시 마을 사람들과 규천정 계원은 석윤홍의 공덕비를 세우겠다고 하였으나 극구 만류하여 성사되지 못했다. 석윤홍이 죽은 지 66년 후인 1993년에 후손과 마을 계원들에 의해 공덕비가 세워진 것이다.”

현장을 가 보니 100여 년 전에 심은 정자나무인데도 수형이 아주 웅장했다. 정자나무 곁으로 도로가 지나가고, 그 아래에는 맑은 샘이 솟고 있었다. 정자나무와 샘 사이로 근래에 도로가 생겼는데도 샘을 교묘히 남겨 두었고, 동신제를 지낸 흔적이 남아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나무를 ‘갈티정자나무’, 샘을 ‘갈티새미’라고 부르며 소중히 지키고 있었다. 정자나무 인근에는 일제 강점기 때 판 것으로 추정되는 방공호가 군데군데 남아 있다. 비문의 내용과 역사의 현장이 일치했다. 마을에 사시는 분들이 이 나무에 대한 역사를 알고 또, 자부심을 갖길 바라면서 비문을 번역해 드렸다.



 
석주환 씨가 갈티새미를 설명하고 있다.
신당리에 남아 있는 방공호들


◇신당리 효부비

당리 정자나무 유래비 이야기를 석주환씨에게 전달하고 나니, 경상국립대 영문과 석종환 교수로부터 전화가 왔다.

“신당리에 우리 할머니 효부비가 있는데, 그 내용을 알고 싶다”고 했다. 석 교수의 안내로 다시 신당리를 찾아갔다. 비석은 마을회관 옆 길가에 서 있다. 비석의 주인공은 구체적으로 어떤 인물이며, 무슨 사연이 기록돼 있는지 궁금증이 발동했다. 비문은 1970년 묵재 하정근이 지은 것이다. 비석의 내용은, 진주시 대곡면에서 하경휴의 딸로 태어나 17살에 집현면 신당리에 사는 석정재에게 시집온 진양하씨의 시집살이 이야기였다. 요지는 아래와 같다.

“진양하씨가 시집을 오니 시부모의 성격이 매우 까칠했다. 그래도 하씨는 성격을 잘 맞추어 큰 불협화음 없이 시부모를 봉양하며 살아갔다. 그런데 시아버지가 갑자기 불치병에 걸려 4년간 병 수발을 들어야 했다. 온갖 약을 구해 치료했으나 낫지 않자 뒷산에 우물을 파고 매일 한밤중 목욕재계하며 하늘에 간절히 기도를 드렸다. 그러나 시아버지는 끝내 운명하고 말았다. 수년간 병 수발을 하면서 가산은 이미 다 소진하고 말았다.

그런데 남편도 백내장에 걸려 실명(失明)해, 앞을 볼 수 없게 되었다. 게다가 남편은 우연히 집을 나가 생사가 불명하다가 9년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온 남편도 시어머니보다 먼저 죽고 말았다. 하씨는 남편을 따라 죽으려고 하다가 늙은 시어머니 봉양 때문에 차마 죽지도 못했다. 대신 남편 위패 앞에서 시어머니 봉양을 잘하겠다고 맹세를 했다. 하씨는 양반집 규수로 태어났지만, 품팔이, 방아 찧기, 삯바느질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며 생계를 잇고 시어머니를 잘 봉양했다. 시어머니가 종기를 앓았는데 입으로 종기를 빨아 낫게 했고, 넘어져 생명이 위급했는데 구급법으로 소생시켰다.”

오로지 52년간 시부모 봉양과 남편 뒷바라지를 하다가 살다 간 진양하씨의 생애 이야기였다. 요즘 같으면 그 고통을 감내하지 못하고 벌써 이혼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인내하면서 산 불쌍한 우리 어머니의 삶이 기록된 비석이었다. 지금은 신당리 마을회관 뒤 공터에 쓸쓸히 서 있다. 마을 정자 아래 쉬시는 분들도 그 비석의 내용을 잘 모른다고 한다. 아들은 어머니의 거룩한 정성과 고단했던 삶을 기록으로 남겨 전하고자 비문을 세운 것이다.

손자인 석 교수의 안내로 진양하씨 묘소를 찾았다. 묘소는 덕오리에서 좁고 비탈진 산길을 따라 2km를 올라가니 있다. 비문이나 표지석도 없다. 선대의 묘소에 비문을 세우지 못했기에 아직 비문이 없다고 한다. 묘소를 보니 어머니를 기리는 아들과 손자의 마음도 잘 느껴진다. 한세상 조용히 살다 가신 우리네 어머니들께 고개가 숙어졌다. 남편 없이 한평생 자식 키우며 온갖 고생만 하다가 가신 어머니의 공덕을 기리는 아들도 훌륭하다. 효자 밑에 효자가 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나는 사람들이나 정자나무 아래 쉬는 분들이 진양하씨의 삶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묵재 하정근이 지은 효부하씨비문과 비석
석종환 교수가 할머니 묘소에 절을 올리고 있다.


◇말티고개 시혜비와 효녀비

신당리를 돌아보고 돌아오는 길에는 말티고개를 넘었다. 말티고개 정상에는 외딴집 2채가 있고, 그 곁에는 범상치 않은 비석들이 즐비하다. 그 앞을 지나다니면서 늘 그 비석의 내용이 궁금했다. 시간을 내 비석을 살펴보기로 했다.

비석은 모두 3종 4기가 남아 있는데, 그중 진주 초전리 소작인 등이 세운 비석이 3개다. 먼저 1923년에 세운 ‘전 참봉 정치권(鄭致權) 시혜불망비’ 1개와 1932년에 세운 ‘전참봉 문장현(文章現) 시혜불망비’가 2개다. 정치권은 재산을 출연해 학교를 설립하고 곡식을 나누어 주민의 굶주림을 구제한 인물이다. 문장현은 진주 옥봉 사람으로 진주 초전 들판의 대지주였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 강점기 때 흉년이 들어 주민이 굶주리자 소작인에게 소작료를 감면해 주어 소작인들이 시혜비를 세운 것이다.

그리고 잡목이 우거진 덤불 속에 ‘효녀함안조씨기실비(孝女咸安趙氏紀實碑)’가 서 있다. 비는 규모도 크고, 제법 격식을 갖추었다. 덤불을 헤치고 비석 내용을 살펴보았다. 강성중(姜聖中, 1898~1939)이 비문을 지어 1935년에 세운 효녀비이다. 주인공은 진주 유수리(柳藪里) 함안조씨 조주서(趙周瑞)의 딸이다. 당시 효녀는 10살이었다. 어머니 장씨가 병이 나 4년간 일어나지를 못하자 극진히 간호하고, 하늘에 간절히 기도하였다. 그러나 어머니의 병세는 점점 깊어만 갔다. 효녀는 자신의 허벅지살을 베어 약에 타서 복용하게 하여 어머니의 병을 낫게 하고, 어머니를 오래 살게 했다. 강성중은 진주 정촌면에 살았으며, 문집으로 ‘이당유고(梨堂遺稿)’가 전한다. 그런데 1963년에 간행된 문집에는 이 비문의 내용이 누락돼 있다.

비석을 둘러보고 있으니 외딴집에 사는 할머니가 궁금해한다. 할머니는 비석 주위 텃밭을 정성들여 가꾸고 있었다. 비석은 잡목이 우거져 비문을 제대로 읽을 수가 없다. 녹슨 자물쇠를 보니 비석은 오랫동안 방치되고 세인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비지정 문화재이고, 후손이 없어 그런지 모르겠다. 비석에 안내문도 세우고 관리도 제대로 했으면 좋겠다.

 
진주 말티고개 비석군
문장현 시혜비에 ‘초전리 소작인’ 글씨가 선명하다.


◇결론

‘집현면지’를 구해 살펴보니, 출세하고 돈 번 사람 이야기만 잔뜩 실려 있고, 앞에서 언급한 신당리 정자나무를 심은 석윤홍 이야기나 효부 하씨 이야기는 한 줄의 기록이 없다. 1995년 진주시에서 간행한 ‘진주금석문총람’을 구해 살펴보니, ‘함안조씨기실비’만 간략히 수록돼 있을 뿐, 위에서 소개한 정치권이나 문장현의 비문은 모두 누락되었다.

고문헌은 국왕 이야기나 아득한 옛날이야기만 기록돼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우리 마을 나의 선조들이 근래에 살아온 이야기가 기록돼 있다. 그런데 고문헌은 안타깝게도 대부분 한자로 기록돼 있다. 근래 한학 세대의 단절로 인해 이제 그 고문헌을 제대로 읽고 해석할 사람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우리 마을의 비석 하나, 정자나무 한 그루도 사연이 없는 것이 없다. 그런데 그 남아 있는 기록을 발굴하지 않으면 모두 돌덩이와 폐지가 되고 말 것이다. 남아 있는 우리 마을의 역사도 우리의 무관심 속에 점점 사라져 후세에는 처음부터 없었다고 말할 날이 올 것이다. 고문헌도서관에서 바쁜 업무 중에도 찾아가서 지역민을 찾아가서 고문헌 상담을 하는 이유다.

이정희 경상국립대 고문헌도서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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