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춘추]어린 시인과의 만남
[경일춘추]어린 시인과의 만남
  • 경남일보
  • 승인 2023.03.21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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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영 경남도립남해대학 교수
김은영 경남도립남해대학 교수

 

아빠는 멋있는 신사였다.

하지만 일을 하면서 고물이 되었다.

고물이 된 신사 힘들어서 녹이 쓴 신사

그런 신사를 황홀한 봄 햇빛으로

깨끗이 닦아 주고 싶다

- 최시우(진해장천초 6), ‘고물이 된 신사’ 전문



3~4년 전 이맘때다. 저녁나절 창원기업사랑공원에서 산책하다가 문득 나무팻말에 새겨진 이 시를 읽게 됐다. 순간 온몸에 전율이 흘러 한참 동안 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제목은 ‘고물이 된 신사’. 글쓴이는 진해장천초등학교 6학년 최시우. 괄호 안에 ‘현재 중학교 1학년’이라는 부기가 붙어 있었다. 필자가 처음 이 시를 읽은 것이 3~4년 전이므로 지금쯤 이 어린 시인은 적어도 고등학생 또래가 돼 있을 터다.

어린 시인은 백일장에 참가해서 직장생활로 ‘녹이 슬어가는’ 아빠의 모습을 시로 표현했다. 그런데 그 시각이 너무나 참신하고 진정성 있다. 아빠는 원래 멋있는 신사였는데, 일을 하면서 점점 ‘고물’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직장생활이 너무 힘들어서 녹슬어가는 고물 신사. 그런 아빠가 안쓰러운 아이.

여느 아이와 마찬가지로 이 어린 시인의 눈에 아빠는 멋진 신사였을 것이다. 누구보다 그 아빠가 매일 힘차게 출근해서 회사와 가정과 지역사회를 위해 의미 있는 역할을 맡는 멋진 모습을 표현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어린 시인이 차분히 관찰한 아빠의 모습은 오히려 하루하루 지쳐서 녹슨 고물이 되어가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어린 시인은 이렇게 쓰고 있다.

“그런 신사를 황홀한 봄 햇빛으로 깨끗이 닦아주고 싶다.”

서정시의 본질은 사랑이다. 사랑 속에서 모든 것은 하나가 된다. 또 사랑 속에서 모든 대상은 가장 진실한 모습으로 이해되고 용납된다. 이 어린 시인은 시를 쓰는 순간 아빠의 삶에 동일시되면서 그 아픔과 힘듦을 깊이 인식하게 됐던 것 같다. 그러니 이제 겨우 6학년밖에 되지 않은 어린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황홀한 봄 햇빛’의 힘을 빌려 아빠의 녹슨 힘듦을 닦아주고 싶다고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드물게 이른 나이에 시적 본령에 다다른 어린 시인의 작품을 마주하면서, 이 친구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성장해 있을지 자못 궁금했다. 더불어 이런 글을 더 많이 읽게 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보았다. 마침 ‘제37회 고향의 봄 백일장’과 ‘제20회 기업사랑 백일장’ 등이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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