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춘추] 한국에 벚꽃이 왜 이렇게 많아요?
[경일춘추] 한국에 벚꽃이 왜 이렇게 많아요?
  • 경남일보
  • 승인 2023.03.28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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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영 경남도립남해대학 교수
김은영 경남도립남해대학 교수


여기저기 꽃놀이가 한창이다. 남해에도 왕지마을처럼 유명한 벚꽃명소가 많다. 남해읍 서변리 남산공원은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남해에서 가장 오래된 벚나무가 군집해 있다.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이 심은 벚나무를 소설적 모티브로 활용한 소설 ‘회나뭇골 사람들’의 공간적 배경이기도 하다. 소설 ‘회나뭇골 사람들’은 요산 김정한이 일제의 검속을 피해 남해공립보통학교 교원으로 생활할 당시 직접 듣고 겪은 일 중 서문 밖 회나뭇골에 살았던 백정 집안의 이야기를 소재로 썼다.

박선봉 노인은 기미년 만세운동으로 큰아들을 잃었다. 작은아들도 고문으로 바보천치가 되고 말았고, 부인은 음부에 서까래만한 통나무가 처박히는 망측한 고문을 당했다. 박 노인은 너무 분한 나머지 경찰이 보는 앞에서 소 잡는 칼로 자신의 성기를 싹둑 잘라버렸다. “독립하겠다고 끝까지 버틴기 그렇게도 나뿐 일이겠소?” 핏자국으로 벌겋게 물든 마당에 서서 박 노인은 이렇게 울부짖었다. 불행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박 노인의 손자 명달은 일본 신사 앞에서 몰래 버찌를 따 먹다가 붙잡혀 벚나무에 동여매이는 벌을 받는다. 어미가 이빨로 밧줄을 물어뜯으며 피를 흘리는 장면에서 소설은 마무리된다.

남해대학에서 근무하기 시작한 첫해부터 필자는 소설의 공간적 배경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 틈틈이 답사를 다녔다. 김정한 소설에서 가장 긴박한 클라이맥스가 벌어진 신사 터를 찾기 위해 위치를 수소문했으나 아는 이가 없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남해공설운동장 뒷길로 연결되는 남산을 오르게 됐다. 야트막한 산 동쪽 진입로 왼편에 3·1독립운동기념비가 있고 정상부에 남해 출신 전몰군경의 영령을 모시는 충혼탑이 세워져 있었다. 충혼탑 앞 너른 공터에 들어서는 순간 ‘여기구나!’ 하는 직감이 들었다. 남해읍을 통틀어 수령이 가장 오래된 늙은 벚나무들이 줄지어 서서 화려하게 꽃을 피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곳은 원래 조선시대까지 하늘에 제사 지내던 천제당지였는데 일제가 제당을 허물고 신사를 세웠다 한다.

몇 년 전 필자에게 한국어를 배웠던 일본인 교환학생이 이렇게 물었었다. “한국 사람들은 일본을 싫어하는데 왜 이렇게 벚꽃이 많아요?” 참, 할 말이 없었다. 산벚·왕벚나무는 한국 자생이고 벚꽃에는 아무 죄가 없지만, 벚꽃이 화려한 만큼 머릿속이 번잡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벚꽃을 보다가 김정한의 소설 한 편이 생각났고, 문득 정신 차리고 보니 우리 주변에 속없이 벚나무가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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