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춘추]약함과 악함
[경일춘추]약함과 악함
  • 경남일보
  • 승인 2023.04.18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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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영 경남도립남해대학 교수
김은영 경남도립남해대학 교수


1999년 봄, 직업도 가족도 모두 잃고 인생막장에 다다른 마흔 살 영호가 야학동창 ‘가리봉 봉우회’의 야유회 장소에 나타난다. 20년 전 첫사랑 순임과 함께 소풍 왔던 곳이다. 야유회를 망치려는 듯 실성한 모습으로 난동을 부리던 그는 급기야 철교 위로 올라가 “나 다시 돌아갈래!” 절규하며 달려오는 열차에 몸을 맡긴다. 설경구 배우의 핏발 선 눈, 핏대 선 목덜미가 너무 생생해서 잊히지 않는 장면이다.

2000년 개봉한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박하사탕’은 주인공 영호가 자살하는 시점부터 첫사랑 순임과 만나게 되는 시점까지의 이야기를 거슬러가며 보여주는 작품이다. 죽기 사흘 전 IMF 사태로 모든 것을 잃고 권총 자살을 기도하는 영호, 1994년 타락한 가구점 사장으로 살아가는 영호, 1987년 운동권 학생에게 폭행과 물고문을 가하는 폭력형사 영호, 1980년 5월 광주에서 귀가하던 여고생을 쏘아 죽인 계엄군 영호, 그리고 1979년 가을, 구로공단 야학에서 순임과 만나기 시작한 스무 살 청년 영호. 영호의 처음이자 마지막 대사인 “나 다시 돌아갈래!”는 바로 한때 순수했으나 악인으로 전락하고 만 인생 패배자의 피맺힌 절규다.

미국의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1963년 발표한 저술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의 평범성’에 대해 역설했다. 나치 치하에서 유대인 학살을 주도했던 아이히만이 체포됐을 때 사람들은 그가 평범하고 가정적인 사람이라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지극히 ‘정상’인 그가 어떻게 그처럼 끔찍한 홀로코스트의 주범이 될 수 있었을까?

사회의 공공영역에서 벌어지는 폭력은 대부분 평범한 개인이 도덕적 반성 없이 권위에 복종하는 과정에서 가혹해지는 양상을 띤다. ‘박하사탕’의 영호도 같은 경우다. 순수했던 청년이 그처럼 타락하고 만 것은 결국 80년 광주에서의 사건 때문이다. 상부의 명령에 의구심을 품었으되 감히 행동으로 드러내지 못했고 ‘어쩔 수 없이’ 벌벌 떨면서 여고생을 죽이고 말았다. 또한 그것이 악행인 줄 알았기에 위악적(僞惡的)으로 자신의 양심을 덮고 속이며 타락에 타락을 거듭했다. 그의 타락은 어쩔 수 없는 연약함의 결과였다.

약한 것은 악한 것이다. 신문 사회면에 숱하게 실리는 학교폭력, 군대폭력,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관습적 폭력에 관한 소식이 남의 일이 아니다. 홀로코스트도 결국은 지극히 연약한 방조자와 협조자들에 의해 자행됐음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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