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예술인을 만나다] 정지원 작곡가
[청년 예술인을 만나다] 정지원 작곡가
  • 백지영
  • 승인 2023.04.24 19: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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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멸의 길 걷는 클래식, 미래세대에 노출 늘려야”
전축으로 듣던 클래식, 자연히 매료
영원불멸 매력에 경남서 작곡 여정
예술인 지원 부족에 脫경남 동료多
청년작곡가협회 설립 등 행보 분주




‘사실상 대가 끊긴 경남 작곡계에서 자신만의 음악 세계를 만들어 나가고 있는 거의 마지막 세대.’

이달 초 청년 작곡가를 소개해달라는 부탁에 도내 한 중견 작곡가는 정지원(34) 작곡가의 이름을 꺼내 들며 이같은 수식어를 붙였다.

‘음악’이라고 하면 K-POP 등 대중가요부터 떠올리고 AI가 음악을 만들어 냈다는 뉴스가 낯설지 않은 시대, 경남에서 클래식 작곡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청년이 궁금했다.

유튜브에서 찾아 들은 그의 곡 ‘야상곡-분산성에서 바라본 밤 하늘’은 달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밤 벚꽃길을 배경으로 한 쌍의 남녀가 손을 마주 잡은 채 느린 템포로 춤을 추는 모습을 보는 것처럼 로맨틱했다. 달콤한 선율을 뒤로 하고 들은 ‘Spring Shower(봄비)’는 고독한 새벽녘처럼 감상에 젖게 하는 곡 초반부를 거쳐 내일을 그리는 희망을 잔뜩 머금은 곡이었다.

이달 중순 김해에서 만난 정지원 작곡가는 “영원불멸한 클래식의 매력에 빠져 클래식 작곡의 길을 걷고 있다”며 “제가 만든 곡이 공연장에서 연주자들에 의해 실제 음악으로 구현되고 그 속에 담긴 감정을 전달하는 게 참 좋다”고 밝혔다.

정 작곡가가 음악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중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취미로 시작한 피아노를 치던 그에게 재능을 엿본 걸까, 주변에서 여러 차례 작곡을 권했다. 경험 삼아 가벼운 마음으로 작곡에 입문한 그는 이내 작곡에 재미를 붙였다.

특히 클래식 작곡에 눈길이 갔다. 어린 시절 부모님이 집에 있던 전축으로 늘 클래식 음악을 틀어뒀던 영향일까, CF나 음악책에서 클래식을 들을 때면 괜스레 반가웠고, 자연히 매료됐다.

“대학 진학을 준비하며 본격적으로 작곡 공부를 시작했는데 쉽지는 않았어요. 경남에는 관련 커뮤니티가 제대로 구축돼 있지 않았거든요. 수소문 끝에 만난 지도자도 작곡 전문이 아니거나, 실용 음악을 하는 분들이 많아 여러 다리를 거친 후에야 클래식 작곡 교육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인제대학교에서 작곡과 학사·석사 과정을 거쳐, 음악 이론으로 박사 학위를 딴 그는 현재 도내에서 작곡과 함께 교육·기획·출강 등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경남청년작곡가협회장을 비롯해 경남창작관현악축제 사무국장, 앙상블 이랑 공연 팀장, 김해음악협회 이사, 인제대·경남대 외래 교수 등 맡고 있는 직함도 여럿이다.

과거에는 예술가로서의 삶만 생각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클래식 음악 후학을 양성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커졌다. 생존을 위한 행보이기도 하다.

“작곡가든 다른 예술가든 공연으로 경제생활을 이어가는 것은 극소수에 국한된 이야기입니다. 보통의 공연은 자신의 돈이 소비되는 일이에요. 작곡가들은 자신의 곡을 연주하는 연주자가 필수적이라 개인 발표에서 소수만 섭외해도 자기 돈을 수백만 원씩 써야 합니다. 관련 기관 사업 공모에 선정돼 보조금을 받는다고 한들 곡을 쓰는 데만 한 달은 걸리고 관련 회의도 수차례 진행돼, 할애한 시간을 계산해 보면 최저 임금의 반에도 못 미칠 겁니다.”

그래도 자신의 곡을 세상에 내보내야 하기에 음악 동료들과 함께 각종 공모 사업에 기획자로 뛰어들기 시작했다.

공모 사업인 경남창작관현악축제를 통해 개인 작곡가 단위로는 비용 부담에 사실상 불가능한, 자신의 곡을 오케스트라로 선보이는 것이 대표적 사례다.

2년 전 그가 설립한 경남청년작곡가협회에서는 도내 시인의 시로 가곡을, 어린이의 동시로 동요를 만들어 오케스트라 연주로 선보이는 활동에 나섰다.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정 작곡가지만 그는 20년 후 자신의 모습을 묻자 쉽사리 답을 내놓지 못했다.

그때까지 버틸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아서다. 그의 수입원 중 하나는 대학 강의 활동인데, 도내 대학들의 작곡과 등 음악 관련 신입생이 꾸준히 줄어드는 추세이기 때문이다.

“10년 뒤 제가 졸업한 도내 예술대학이 존재할까 전망해 보면 없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면 저도 다른 일을 찾아봐야 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다른 기성 음악가들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술 인프라가 열악하니 기존 예술가가 타지역으로 이동하고 대학 내 전공이 없어지고, 대학 내 전공이 없으니 자연히 꿈나무들이 타지역으로 진학하는 악순환의 연속이다.

도내 동료 작곡가들이 예술에 대한 관심·지원이 풍부한 타지역으로 떠나거나, 경남에 머무를 경우 생존을 위해 작곡을 그만두고 전혀 다른 일을 하는 모습을 보는 일이 부지기수다.

“제발 가라고 내몰리는 느낌이 든다. 그냥 서울로, 부산으로 가라고 누군가가 떠밀면서 예술가의 퇴출을 부추기고 있는 것만 같다”는 그의 말이 씁쓸했다.

그나마 ‘소멸의 길’을 피하기 위해서는 미래의 꿈나무들에게 클래식을 노출할 기회를 최대한 많이 만들어야 한다는 게 정 작곡가의 생각이다.

“요즘 학생들은 ‘클래식 음악’이라고 하면 베토벤·모차르트만 생각하지 클래식 음악을 지금 이 시대에도 작곡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못하는 것 같아요. 저는 전축으로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자랐지만, 요즘 어린이들은 ‘핑크퐁(어린이용 콘텐츠)’를 듣죠. 그 안에도 클래식 멜로디가 있기는 하지만, 대중음악이나 실용 음악 쪽으로 많이 노출되는 경향이 있어요.”

그가 속한 ‘앙상블 이랑’은 이달부터 올해 ‘꼬마 작곡가’ 교육을 시작한다. 작곡은 음악을 잘하는 사람만 가능하다는 인식에서 탈피해, 강사들이 어린이들의 손발이 돼 어린이들의 생각을 음악으로 만들어 주는 활동이다.

정 작곡가는 “대중음악이 많은 인기를 끄는 것은 어쩌면 그 이외 음악 세계는 사람들이 잘 몰라서일 수도 있다”며 “언제까지가 될 진 모르겠지만 클래식의 매력을 알리기 위해 작곡을 비롯해 공연·교육 기회를 만드는 데도 계속 힘쓸 계획”이라고 밝혔다.

백지영기자 bjy@gnnews.co.kr

 
정지원 작곡가가 태블릿 PC로 자신의 창작곡 악보를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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