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춘추]재벌집 막내아들
[경일춘추]재벌집 막내아들
  • 경남일보
  • 승인 2023.04.25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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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영 경남도립남해대학 교수
김은영 경남도립남해대학 교수


‘이야기의 바깥은 없다’고 한 어느 평론가의 말처럼 사람은 이야기를 떠나 살 수 없다. “내 이야기를 풀어 쓰면 소설 10권은 족히 나올 것”이라는 노인들의 산전수전 이야기는 절대 거짓이 아니다. 모든 인간은 세대불문하고 이야기를 통해 자아정체성을 확립해 나간다. 사람들이 소설을 읽고 드라마에 몰두하는 것도 결국 어떤 형식으로든 편집된 이야기를 통해 인생에 대한 해답을 얻고자 하기 때문이다. 하여 어떤 시대든지 유행하는 이야기의 형식 속에는 그 시대 사람들의 무의식적 갈망이 반영되기 마련이다. 가령 요즘 사람들이 즐겨보는 웹소설이나 드라마에서 주인공의 환생이나 회귀 모티프가 빈번히 등장하는 것도 시대적 무의식의 반영으로 읽을 수 있다. ‘이번 생은 망했으니’ 현생의 기억을 모두 간직한 채 20년 전으로 회귀해 재벌집 막내아들로 환생한다면, 원수도 갚고 재벌도 되고 현생에서 못다 이룬 성공에 기적처럼 다다를 수 있겠다는 꿈같은 이야기 말이다.

17세기 조선에서도 이런 이야기 광풍이 불었었다. 임진왜란 이후 서민의식의 급속한 성장과 함께 한글소설에 대한 수요가 급격히 증가했고, ‘박씨전’처럼 초인적인 힘을 가진 여성 영웅이나 재자가인의 출세담, 연애담이 인기를 끌었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당시 독자들의 상상적 바람을 반영한 결과였다. 전기수가 장터에 자리 잡고 앉아 소설을 읽어주는 풍경도 흔했다. 이덕무(李德懋, 1741~1793)의 ‘아정유고(雅亭遺稿)’에 따르면, 종로 담뱃가게에서 어떤 사람이 전기수가 읽어주는 이야기에 몰두한 나머지 분노해 담배 써는 칼로 사람을 찔러 죽이는 사건도 발생했다 한다.

이런 가운데 허균이나 김만중 같은 작가의 등장도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다. 매설(賣說)을 떳떳지 않게 여겼던 당시 양반층의 분위기상 과감히 실명을 앞세우고 서얼제도의 불합리성을 비판하고 나선 허균의 ‘홍길동전’이나, 소설의 정치적 효용성을 본격적으로 제기한 김만중의 ‘사씨남정기’는 바로 이야기의 힘으로 세상을 바꾸려는 의도를 전면에 내세웠던 작품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들의 소설에서 홍길동은 율도국의 왕이 됐고, 사씨는 교씨를 축출했다. 또 인현왕후는 장희빈을 몰아내고 왕비의 지위를 되찾았다.

그렇다면 요즘 우리 젊은이들은 왜 재벌집 막내아들로의 회귀를 꿈꿀까. 정녕 다시 태어나지 않는 한 ‘개천에서 용’ 나는 일은 불가능하기 때문일까. 환생 판타지가 모든 대중 서사에서 맹위를 떨치는 상황에 대해 곰곰 따져봐야 할 시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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