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춘추]시 읽는 사회
[경일춘추]시 읽는 사회
  • 경남일보
  • 승인 2023.05.23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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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순 뜻있는 도서출판 대표
 
이지순 뜻있는 도서출판 대표


일반인이 대중 앞에 서서 말할 기회는 흔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모임은 많다. 모임에 가면 뒤풀이 때 돌아가면서 건배사를 시킨다. 배운 적도 없고 짧은 시간에 해줄 말도 없고 맨날 ‘에또…’ 하고 말하기도 식상하다. 그렇다고 남들이 다하는 청바지(청춘은 바로 지금부터) 개나발(개인과 나라의 발전을 위하여)을 하기도 진부하다.

출판사 대표라고 ‘새로 쓰는 주역강의’ 책을 내고부터는 주역에 나오는 시진핑이 자주 쓴다는 ‘범익지도면 여시해행(凡益之道 與時偕行)’이라는 건배사를 자주 썼다.

세상에 무릇 도를 알아도 그 행함에 있어서는 때가 있다는 뜻인데 같은 모임에 똑같은 건배사를 쓰는 것이 또 금세 식상해졌다. 그래서 어느 날엔 조지훈 시인의 ‘사모’라는 시를 읽는 것으로 건배사를 대신했다. 이 시의 뒷부분 ‘한 잔은 떠나 버린 너를 위하여/또 한잔은 이미 초라해진 나를 위하여/그리고 한잔은 너와의 영원한 사랑을 위하여/마지막 한잔은 미리 알고 정하신 하나님을 위하여’를 외워 읽었더니, 뜨거운 반응과 함께 박수(?)를 받았지만 어떤 분은 뜨악해 하기도 했다. 그 뒤부터 시를 외워하는 건배사를 하기 시작했는데, 모임의 격이 높아지는 듯 했다. 필자의 시 건배사는 점점 친한 모임에서는 하나씩 시를 골라서 읽는 건배사를 하는 형태로 나아갔는데, 건배사를 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내면이 변화하는 듯한 신기한 경험을 털어놓기도 했다.

일행들은 처음에는 쑥스러워 하면서도 ‘나리 나리 개나리’를 외우고 ‘국화 옆에서’를 외우던 친구들이 어느 날은 ‘이화에 월백하고’를 외우고 ‘강이 푸르니 새는 더욱 희고’를 외웠다.

요즘은 각자 어디서 시를 한 구절씩 찾아오고 시집을 사보기도 한다. 작은 실천이 모임의 분위기를 바꾼 셈이다. 최근에 시를 낭독하는 모임이 늘었다. 시 한 구절이 주는 감흥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나도 최근엔 현대 시집들을 출판하고 싶은 욕구가 새로 생겼다.

대중적인 시집에서부터 젊은 시인들의 전위 시집까지 읽어내는 수준을 얻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림을 전문적으로 보는 눈이 없어도 우리가 피카소와 고흐의 전시장을 찾는 것처럼 좀 어려운 시집들도 찾아 읽어보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내가 아는 한 시인이 그랬다. 시를 천편 필사하면 누구든 시인이 될 수 있다고. 시인은 혁명가가 될 순 없지만, 혁명가를 시를 통해 키울 수는 있다고. 시에 대한 고정관념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나도 시를 한 번 써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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