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포럼]대통령 말에 귀를 씻는 사람들
[경일포럼]대통령 말에 귀를 씻는 사람들
  • 경남일보
  • 승인 2023.05.29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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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점석 경남작가회의 회원
전점석 경남작가회의 회원


하동군 화개면 신흥리의 의신 쪽에서 흘러오는 냇물을 따라가면 칠불사와 대성골 쪽으로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바로 이 삼거리에 있는 의신계곡 절벽에 ‘세이암(洗耳岩)’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신라 말에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 세상을 등지고 해인사에 은거했을 때 왕이 사신을 보내 국정을 논의하자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고운은 가야산을 나와서 지리산 쌍계사 옆을 흐르는 화개천을 따라 걷다가 속세의 이야기들로 더러워진 귀를 여기서 씻고 개울가에 지팡이를 꽂고 나서 신선이 되어 지리산으로 입산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그 귀를 씻었다는 곳이 바로 세이암이다. 지팡이는 그후 무럭무럭 자라서 늠름한 푸조나무가 되었다. 현재 경상남도 기념물 제123호로 지정되었다. 고운은 마산에서도 생활한 적이 있다. 마산 의신여중을 지나 교방동 산복도로를 건너면 서원골 입구가 나온다. 이 서원골 계곡에 ‘세이탄(洗耳灘)’이라는 글귀가 바위에 세겨져 있는 웅덩이가 있었다. ‘귀를 씻는 여울’이라는 뜻이다. 고운이 이곳에서 자주 몸을 씻었다고 한다. 바위가 있던 곳은 예전 관해정 위 백운사 부근 계곡의 너럭바위에서 약간 더 올라간 곳이라고 한다. 지금은 그 바위를 찾을 수 없다. 울산시 울주군의 언양읍과 상북면에 걸쳐있는 화장산(花藏山) 자락에 위치한 향산리에는 세이지(洗耳池, 씻골못)라는 작은 연못이, 지내리에는 소부당(巢父堂)이라는 정자가 있다. 동네 사람들이 이 정자에 앉아서 허유 같은 사람이 귀를 씻는 걸 본 모양이다.

산청에는 귀가 아니라 마음을 씻는 곳이 있다. 남명 조식의 제자들이 건립한 덕천서원 앞 덕천강가에 있는 세심정(洗心亭)이다. 산청에 살고 있는 한국화가 현석(玄石) 이호신이 ‘세심정’을 그렸다. 홍살문 옆에 키 큰 나무가 자리 잡고 있고, 새 한 마리가 날아왔다. 홍살문은 원래 경계를 나타내는 설치물인데 충신, 효자, 열녀를 추앙하여 이들의 집 앞에 표창을 내리는 뜻으로 세우기도 했다. 존경과 격식을 갖추는 의미이다. 그림에 있는 작은 새는 나무 왼쪽 아래에 자그맣게 그려져 있는 세심정에는 가지 않았다. 씻을 게 없는 모양이다. 세심정은 서원에서 공부하던 유생들이 휴식을 취하던 정자이다. 정자 앞에는 남명이 지은 ‘욕천(浴川)’ 시비가 서 있다. 이 시를 보면 허유와 고운은 귀를 씻는 정도에 그쳤지만 남명은 배를 갈라서 티끌이 묻은 오장을 씻는 단호한 자세이다.

‘사십 년 동안 더럽혀져온 이 몸/ 천 섬 되는 맑은 못에 싹 씻어버렸네/ 오장 속에 만약 티끌이 생긴다면/ 지금 당장 배를 갈라 흐르는 물에 부쳐 보내리’

윤석열 대통령이 미국 국빈방문에 앞서 워싱턴 포스트지와 4월 24일 인터뷰를 했다. “나는 100년 전에 일어난 일 때문에 뭔가 절대 불가능하다거나, 100년 전 역사 때문에 (일본이)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생각을 받아 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무릎을 꿇는다’는 표현은 일본이 100년 전 일 때문에 계속 사과할 필요는 없다는 이야기를 강조한 것 같다. ‘100년’이라는 표현도 오래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때껏 일본은 무릎은커녕 허리도 굽히지 않았다. 오히려 위안부와 강제징용한 사실도 제대로 인정한 적이 없다.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것 같다. 오히려 아베 총리는 2015년 8월, 담화문을 발표하면서 ‘전쟁에 아무런 관계가 없는 우리의 자녀나 손자 그리고 그 뒤 세대의 아이들에게 사과를 계속할 숙명을 지게 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자기가 인정하면 그게 미래 세대에게 굴레가 된다는 뜻이다. 우리 대통령이 일본 총리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정말 실망스럽고, 부끄럽고, 화가 난다. 이런 말을 들은 귀를 씻으러 세이탄에 들렸다가 못마땅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세심정에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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