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칼럼]큰아버지가 그토록 지키고자 한 것
[여성칼럼]큰아버지가 그토록 지키고자 한 것
  • 경남일보
  • 승인 2023.06.07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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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정 ㈔진주성폭력피해상담소장
정윤정 ㈔진주성폭력피해상담소장


지난 오월 진주에서는 여성 친화 지역특성화사업에 선정된 정승오 감독의 영화 ‘이장’ 공동체 상영이 있었다. 가족이 사랑과 고마움 그리고 미안함과 같은 따뜻한 마음을 나누는 것이 어찌 이리 낯설고 서툴까? ‘낯섦’과 ‘서투름’은 경험이 말해준다. 각자의 성장 배경과 그 사회 문화가 익숙함과 낯설고 서투름을 정한다. 도대체 어떤 문화가 물보다 진한 핏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에게조차 따뜻한 마음 표현을 서툴게 했단 말인가?

영화 ‘이장’은 마을 이장이 아닌 묘 이장을 말한다. 아버지의 묘 이장을 두고 큰아버지와 5남매(순서대로 딸4 아들1) 조카가 가부장제를 향해 날리는 이야기다. 지금 시대에 무슨 가부장제인가 하겠지만 지금도 ‘장례문화’나 ‘제사 문화’에서 가부장제를 고수하고자 하는 의지가 가장 많이 남아있다. 즉, 장례문화나 제사 문화가 가장 보수적이라 할 수 있다. 제주(祭主, 제사의 주장이 되는 상제)가 남성인 한국 사회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가부장제를 법으로 인정하고 보존해온 것이 호주제다. 호주제도는 남아선호, 남녀 차별, 가족 내 권력관계 형성, 다양한 가족 형태를 비정상 가정으로 만드는 가족 관념이었다. 특히 여성은 혼인 전에는 아버지가 호주인 호적에, 결혼하면 남편이 호주인 호적에, 남편이 사망하면 아들이 호주인 호적에 올라야 하는 예속적 존재로 규정했다. 비단 여성뿐만 아니라 호주제도는 호주와 다른 가족 구성원 간의 관계를 종속적이고 권위적인 관계로 규정했다. 이에 새천년을 앞둔 1999년, 한국에만 유일하게 존재하는 제도의 후진성에 대한 문제 제기, 유엔 인권이사회의 호주제 폐지 권고, 선구자들의 다 년 간의 노력으로 2005년 마침내 폐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를 보면 우리가 피를 나누고, 대신 목숨도 내놓을 수 있는 가족임에도 따뜻한 마음을 나누는 것이 왜 낯설고 서툰지를 이해할 수 있다.

영화에서 큰아버지는 묘 이장을 두고, 4녀인 조카들만 나타나고, 1남인 조카가 참여하지 않은 것을 용납하지 못한다. 부지개발로 아버지 묘를 이장해야만 하는 딸들은 큰아버지의 성화에 1남인 남동생을 찾아 나선다. 아들 없이는 한 삽도 뜰 수 없다는 큰아버지의 완고함을 이기지 못해 연락도 없이 지내던 동생을 찾아 나선다. 큰아버지는 묘를 파서 다른 곳에 묻길 원하고, 딸들은 묘 관리도 되지 않으니 화장을 원한다. 뒤늦게 참여한 아들이 큰아버지의 뜻에 따르며 남매간 갈등이 깊어진다. 아버지 무덤에서 마지막 제를 올리던 중 아들이 말벌에 쏘여 응급실을 가게 된다. 큰아버지가 그렇게 지키고자 했던 장남 참여 원칙이 말벌 한 마리로 무너진다. 결국 딸이 제를 지내고 딸들이 묘를 이장한다. 큰아버지가 그토록 사수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었단 말인가, 참 허무한 블랙코미디다.

가부장제에 의한 성차별과 아버지가 딸을 사랑하는 것은 구별되어야 한다. 큰아버지는 자다 일어나 조카들이 자는 방이 차갑지는 않은지 바닥을 만져보고 방에 불을 한 번 더 지핀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품인 휴대전화에는 딸들에게 미처 전송하지 못한 ‘사랑한다’는 메시지가 남아있다. 큰아버지가 조카들 방을 따뜻하게 하고, 아버지가 딸들을 사랑했다는 마음을 확인하는 것이 성차별의 부조리를 희석시킬 수는 없다. 조카를,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 가부장제를 정당화하고, 성차별을 용인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아버지가 딸을 사랑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무엇이 그에게 제 자식에게 사랑한다는 말조차 할 수 없게 했단 말인가?

가부장제가 몸에 밴 어른과 성평등이 몸에 밴 세대가 상호 존중으로 가정문화를 평화롭게 바꾸어 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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