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필 시인
강을 따라 달린다. 죽은 잎이 달라붙는다. 비를 몰고 오는 남동풍에 버드나무 가지가 바삭바삭 뒤집힌다. 땅이 밟히며 쉿쉿쉿 소리를 낸다. 길에서 먼지가 떨어진다. 그리고 머리 위로 작고 푸른 잎들이 부드럽게 충돌한다.
자전거를 타는 행위는 명상적이다. 공간이 공간을 밀어내면 체인이 돌고, 생각이 오고 간다. 기계는 사람의 몸에서 한 뼘 떨어져 있다. 은유적이다. 바퀴 두 개, 핸들 바 두 개, 페달 두 개. 자전거와의 접촉은 다감하다. 손, 발, 엉덩이. 이 녹슨 3단 변속 기어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금속이 나의 일부인 것처럼 대신 울어 준다. 바람을 만들어주고 대신 숨을 쉬어 준다. 그런 게 고맙다.
자전거를 묘사하려면 먼저 자전거를 사랑해야 한다. 자전거는 부분의 합보다 크다. 시가 그렇듯이 자전거와 사람의 결합도 그러하다. 비 속에 앉아 있을 수 있고 햇빛 속을 항해할 수도 있으며, 한여름밤을 지나가는 빛나는 갑옷 입은 말이 된다. 자전거는 단순히 탈것, 그 이상의 존재다. 안장에 앉는 순간 우리는 켄타우로스가 된다. 야생과 길들임 사이에서 우리는 존재의 두 가지 상태에 끼이게 된다. 자전거를 타면 목줄 풀린 채 쫓아오는 개가 증명해준다. 개는 죽자 사자 하고 이 짐승인간을 쫓아온다. 물론 개의 추적을 따돌리는 ‘개 스프레이’가 있다. 분사하라. 망설임 없이.
자전거는 누구의 시간도 공간도 에너지도 빼앗지 않는다. 공정하다. 일상의 사상은 이 기하학적 바퀴와 페달에서 온다. 고요는 자전거를 타고서만이 올 수 있다. 다시 안장에 앉으면 타오르는 옥수수밭처럼 지구는 어제보다 더 뜨거우며, 머리 위에는 텅 빈 하늘이 무한의 원을 그리고 있다. 비둘기 몇 마리가 교각 밑에 앉아 쉰다. 공사 차량이 멀어져 간다. 폭우가 내릴 것이다. 희미한 구원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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