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계현 경상남도의회 제1부의장
“진주는 지리산 동쪽의 큰 고을로 정승과 장수가 될만한 인재가 나왔다. 땅이 기름지고 강과 산의 경개(景槪)가 있으므로 사대부는 넉넉한 살림을 자랑하며 또한 격조 높은 한량(閑良)들이 있었다.(하략)”
조선 후기의 실학자 청화산인 이중환(李重煥, 1690~1752)이 지은 택리지(擇里志)에 진주를 설명하는 구절이다. 필자는 이 짧은 문장 안에 진주를 상징하는 키워드 3개가 모두 들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바로 인재(人才), 실용(實用) 그리고 한량(閑良)이다.
먼저, 인재는 곧 교육도시 진주를 뜻한다. 우리 진주는 고려 성종 12목 개설 당시(987년)부터 진주향교가 설치돼 수많은 인재를 배출해 낸 명실상부한 국내 최고의 교육도시다. 또한 실용은 허례보다는 실속을, 공리공담보다는 실제를 우선시하는 기풍으로 국내 굴지의 재벌이 진주를 중심으로 탄생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즉 진주는 오래된 미래와 같이 이미 실용을 중심으로 하는 K-기업가 도시의 싹을 내재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마지막 한량은 무엇인가.
필자가 생각할 때 한량은 단순히 ‘무과에 급제해도 벼슬이 없는 사람’이나 혹은 ‘일정한 직사(職事)없이 놀고 먹는 양반계층’이라는 국어사전의 뜻과 달리 ‘여유와 풍류가 있는 유한(有閑) 생활인’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다시 말해 꼭 경제적으로 넉넉지 아니해도 각박한 생활 일선에서 한 발짝 살짝 떨어져 세상을 관조하며,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지 않고 여러 사람의 의견에 귀 기울이면서 생활의 맛과 멋을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한량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여러 진주시민들은 자동차로 30분 거리의 지리산과 남해를 두고 인근 지역에 시골집을 개조한 별장이나 농막에서 주말을 보내는 ‘성실한 5도 2촌 생활자’라고 생각된다. 이것이야말로 진주다운 한량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러한 진주 사람들의 한량 기질을 잘 나타낸 춤이 있으니 이것이 바로 한량무(閑良舞)이다. 한량무는 교방 계통의 춤으로 1865년 고종(高宗) 때 정현석(鄭顯奭)이 편찬한 ‘교방가요(敎方歌謠)’와 의기 논개의 제례를 위해 작성된 ‘진주의암별제지(晋州義岩別祭志)’ 등에서 ‘진주 감영에서 연희 된 춤’이라는 역사적 정통성 있는 무형문화재이다. 이 춤은 주로 남사당패 등에 의해 전승된 서울(2014년 지정)이나 전주의 한량무(2011년 지정)와는 달리 그 역사적 연원과 계통이 분명하며, 무엇보다도 개천예술제 이사장과 초대 진주문화원장 등을 역임하신 박세제(朴世濟) 선생에 의해 1979년에 발굴, 경남도 무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된 경남의 대표적 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러한 진주 한량무가 2014년부터 10년 넘게 보유자 지정을 둘러싸고 분쟁 중에 있다. 물론 여러 사정이 있겠지만 필자가 볼 때 행정에서 확립된 원칙을 갖고 분쟁 해결에 최선을 다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평양 부벽루, 밀양 영남루와 함께 대한민국 3대 명루(名樓)로 국보 승격을 추진하는 촉석루가 진주를 대표하는 유형문화재라면 한량무는 진주를 대표하는 무형문화재라고 생각된다.
누가 더 한량무의 원형과 전승의 정통성이 있는지 또한 이를 더 잘 계승시켜 국가 문화유산으로 발전시킬 수 있을지 등의 객관적인 기준을 가지고 경남도를 비롯한 행정기관에서 갈등 해결을 위해 노력한다면 반드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아무쪼록 분쟁의 조속한 해결과 함께 국가 문화재로 승격이 이루어져 촉석루 휘영청 달빛 아래 신명난 한량무 춤사위가 가득해지길 기원한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청화산인 이중환(李重煥, 1690~1752)이 지은 택리지(擇里志)에 진주를 설명하는 구절이다. 필자는 이 짧은 문장 안에 진주를 상징하는 키워드 3개가 모두 들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바로 인재(人才), 실용(實用) 그리고 한량(閑良)이다.
먼저, 인재는 곧 교육도시 진주를 뜻한다. 우리 진주는 고려 성종 12목 개설 당시(987년)부터 진주향교가 설치돼 수많은 인재를 배출해 낸 명실상부한 국내 최고의 교육도시다. 또한 실용은 허례보다는 실속을, 공리공담보다는 실제를 우선시하는 기풍으로 국내 굴지의 재벌이 진주를 중심으로 탄생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즉 진주는 오래된 미래와 같이 이미 실용을 중심으로 하는 K-기업가 도시의 싹을 내재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마지막 한량은 무엇인가.
필자가 생각할 때 한량은 단순히 ‘무과에 급제해도 벼슬이 없는 사람’이나 혹은 ‘일정한 직사(職事)없이 놀고 먹는 양반계층’이라는 국어사전의 뜻과 달리 ‘여유와 풍류가 있는 유한(有閑) 생활인’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다시 말해 꼭 경제적으로 넉넉지 아니해도 각박한 생활 일선에서 한 발짝 살짝 떨어져 세상을 관조하며,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지 않고 여러 사람의 의견에 귀 기울이면서 생활의 맛과 멋을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한량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여러 진주시민들은 자동차로 30분 거리의 지리산과 남해를 두고 인근 지역에 시골집을 개조한 별장이나 농막에서 주말을 보내는 ‘성실한 5도 2촌 생활자’라고 생각된다. 이것이야말로 진주다운 한량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러한 진주 사람들의 한량 기질을 잘 나타낸 춤이 있으니 이것이 바로 한량무(閑良舞)이다. 한량무는 교방 계통의 춤으로 1865년 고종(高宗) 때 정현석(鄭顯奭)이 편찬한 ‘교방가요(敎方歌謠)’와 의기 논개의 제례를 위해 작성된 ‘진주의암별제지(晋州義岩別祭志)’ 등에서 ‘진주 감영에서 연희 된 춤’이라는 역사적 정통성 있는 무형문화재이다. 이 춤은 주로 남사당패 등에 의해 전승된 서울(2014년 지정)이나 전주의 한량무(2011년 지정)와는 달리 그 역사적 연원과 계통이 분명하며, 무엇보다도 개천예술제 이사장과 초대 진주문화원장 등을 역임하신 박세제(朴世濟) 선생에 의해 1979년에 발굴, 경남도 무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된 경남의 대표적 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러한 진주 한량무가 2014년부터 10년 넘게 보유자 지정을 둘러싸고 분쟁 중에 있다. 물론 여러 사정이 있겠지만 필자가 볼 때 행정에서 확립된 원칙을 갖고 분쟁 해결에 최선을 다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평양 부벽루, 밀양 영남루와 함께 대한민국 3대 명루(名樓)로 국보 승격을 추진하는 촉석루가 진주를 대표하는 유형문화재라면 한량무는 진주를 대표하는 무형문화재라고 생각된다.
누가 더 한량무의 원형과 전승의 정통성이 있는지 또한 이를 더 잘 계승시켜 국가 문화유산으로 발전시킬 수 있을지 등의 객관적인 기준을 가지고 경남도를 비롯한 행정기관에서 갈등 해결을 위해 노력한다면 반드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아무쪼록 분쟁의 조속한 해결과 함께 국가 문화재로 승격이 이루어져 촉석루 휘영청 달빛 아래 신명난 한량무 춤사위가 가득해지길 기원한다.
저작권자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