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상보 함양백전초등학교 교사
어린 시절 나의 아버지는 평일에 집에 계셨던 적이 거의 없었다. 보험 판매를 하셔서 아침 일찍 집을 나서셨고, 술자리를 좋아하는 성격 탓에 항상 술이 걸쭉하니 취하신 채 자정이 돼서야 집에 돌아오셨다. 단 하루 쉬는 날인 일요일의 오전, 아버지는 거실에 앉아 일주일 치 신문들을 꺼내 그 위에 한자(漢字)를 빼곡히 써 내려가시곤 했다.
나의 할아버지는 충남 청양군의 꽤 유명한 한학자이셨다. 하지만 근대교육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신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서당에 보내셨고, 그 결과 아버지는 국민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하셨다. 할아버지께서 생계 일을 하지 않으시니 머슴까지 부렸던 가세는 점점 기울었고, 결국 아버지는 중고등학생 나이에 한약방 머슴을 살게 되셨다. 한약방에 딸린 추운 골방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약재 절단기에 손가락 일부가 잘려 나가는 고통까지 겪어가며 그렇게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단 한 번도 할아버지를 원망하신 적이 없다고 한다. 오히려 학자로서의 뜻을 굽히지 않고 올곧이 사신 할아버지의 학식과 기개가 존경스럽다고 말씀하셨다. 어렸을 적부터 공부를 곧잘 한 나를 키우시면서도 항상 흐뭇해하셨다. 할아버지와 나는 아버지의 자랑스러운 얼굴이었다. 어느 날 아버지께서 어린 나를 옆에 앉혀놓고 써주신 한자가 기억에 남는다. “상보야, 아빠는 네가 이런 사람이 되면 좋겠구나” 하시며, 수려한 필체로 쓰신 네 글자는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큰 사람이 되어라’라는 뜻의 ‘溫心大人(온심대인)’이었다. 아버지는 나에게 바로 그런 분이시다. 학교도 제대로 못 다니셨고, 참 가난했지만 마음만큼은 큰 부자셨다. 지역 성당의 사회복지분과장을 하시며 독거노인들을 위해 매해 겨울마다 쌀과 김치를 나르시고, 홀로 된 어린이들을 위해 장학금을 마련하시는 등 따뜻한 마음으로 주변을 살피며 낮은 곳을 향해 항상 큰 품을 내어 주시는 나의 아버지가 바로 나의 ‘溫心大人’이시다.
일요일 아침마다 아버지께서 신문에 하염없이 쓰신 많은 한자들이 이제야 더욱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아버지에게 ‘신문’이란 존재는 ‘맘껏 다니지 못한 학교의 교과서’와 같았고, ‘삶의 애환이 묻어나는 일기장’이었다. 현재 암 투병 중이신 나의 아버지께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담아 당신의 삶이 새겨진 이 신문을 보여드릴 생각이다. “아버지께서 걸어오신 따뜻한 삶을 존경합니다. 저에게 몸소 보여주신 큰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부족하지만 잘 따르겠습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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