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역사는 진주에 무엇을 남겼나 [7]맨 앞에 선 저항정신
천년 역사는 진주에 무엇을 남겼나 [7]맨 앞에 선 저항정신
  • 임명진
  • 승인 2024.10.07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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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이 일어섰소, 백정이 일어섰소" 그 땅이 품은 평등의 세상
진주는 저항과 포용의 역동적인 도시다. 1862년 가혹한 수탈에 항거한 농민들의 분노에 찬 함성, 1923년 신분차별에 고통받던 백정들과 함께 한 형평운동, 나라의 미래인 아동과 여성을 보호하자는 소년운동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진주 사람들은 가장 먼저 주체적으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진주시 수곡면에 2012년 세워진 진주농민항쟁기념탑. 진주 농업인단체협의회는 1862년 진주지역에서 일어난 농민항쟁을 기념해 기념탑을 세웠다. 나선형 계단 형상의 기념탑 주변에는 농민항쟁에 나서 죽은 이들의 이름을 새겨 둘러 세웠다. 기념탑 앞에는 안내석과 정동주 시인의 ‘하늘 농부’ 시를 새긴 시비가 있다. 지난 여름 찾았을 때 기념탑 앞을 지키던 소나무 두 그루는 왠일인지 베어지고 없다.
진주농민항쟁기념탑 둘레에 새긴 이름들. 사노라는 성 아닌 성이 붙은 이름들이 보인다. 私奴 개인이 부리던 노비를 뜻하는 이름이다.
◇불의에 ‘저항’=농민들의 외침

진주 농민항쟁은 조선의 봉건적 질서로는 더 이상 나라를 지탱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준 농민들의 외침이었다.

1862년 부패한 관리들의 수탈이 갈수록 극심해지자 진주에서 농민들의 봉기가 일어났다. 당시 조선은 곡식이 부족한 봄철에 가난한 농민들에게 곡식을 빌려주고 추수기인 가을에 갚도록 하는 환곡제도를 운영하고 있었다. 하지만 부패한 관리들이 이를 횡령하고 부족한 곡식은 각종 명목을 붙여 농민들이 부담하게 했다.

수탈에 참지 못한 진주의 농민들은 1862년 2월 6일 수곡장이 열리던 ‘무실(수곡)장터’에서 항쟁의 뜻을 모으고, 14일 덕산장이 열리는 곳에서 첫 봉기를 시작했다.

진주시 수곡면에 세워진 ‘진주 농민항쟁 기념탑’에는 ‘농민항쟁은 단순히 수탈에 대한 불만에 의해 촉발되었던 것만은 아니다. 그 밑바닥에는 당시의 사회체제를 바꾸려는 운동의 흐름이 있었다(중략)’고 설명하고 있다.

실제 농민항쟁의 주축은 농민들이었지만 몰락한 양반이 항쟁을 주도하고, 천민들도 가담할 정도로 대중의 폭넓은 지지를 받으며 후에 동학농민운동으로 발전해 갔다.

결국 기존 봉건적 질서로는 더 이상 나라를 운영할 수 없다는 걸 실감한 조선은 1894년 갑오개혁을 단행하게 된다.

진주 농민항쟁은 우리 근대사에 한 획을 긋는 개혁의 도화선 역할을 한 것이다.

 
형평운동기념사업회가 각계의 성금을 모아 1996년 12월 준공한 형평운동기념탑. 진주성 촉석문을 바라보고 섰던 탑은 2017년 현재의 위치로 자리를 옮겼다.
◇차이를 ‘포용’=백정의 간절함에 동참

진주에서 일어났던 극적인 여러 사건 중 형평운동을 빼놓을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 신분제는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공식적으로 사라졌지만, 천민들에 대한 차별의 관습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 중 백정은 같은 천민이지만 기생, 노비보다 아래인 최하층 신분이었다. 별도의 장소에 거주하고, 의복에도 백정이라는 점을 드러내야만 했다.

진주에 거주하던 백정들은 가장 먼저 이런 차별에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1900년에는 관찰사에게 몰려가 백정 표식을 착용하지 않게 해 달라는 집단 청원을 했다.

1909년에는 진주에서 기념비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1905년에 호주 선교사가 서부경남 최초로 세운 진주교회에서 일반 교인들이 백정 교인들과 함께 교회에서 예배를 보는 것을 수용하면서 동석 예배가 성사된 것이다. 이 사건이 당시에 얼마나 큰 충격으로 다가왔는지, 박경리 작가의 대하소설 ‘토지’에도 언급될 정도였다. 소설에서는 동석예배가 실패한 것으로 나오지만 후에 호주 선교사들이 남긴 기록에서 동석예배가 성사되었음이 확인됐다.

진주의 백정들은 1910년에는 일본인들의 도축시장 진출에 맞서 도축 조합을 결성하려고 시도했다. 일제의 방해로 실패로 끝났지만 진주에서 발생한 일련의 백정 관련 사건들은 1923년 진주에서 백정들의 신분 차별 철폐를 위한 단체인 ‘형평사’ 출범으로 이어지게 된다.

진주 백정들의 활동에는 백정이 아닌 진주 사람들의 적극적인 지지와 동참이 있었다. 강상호, 신현수, 천석구 선생 등 진주 사람들은 백정을 향한 차별을 없애는데 앞장섰다. 이들이 아니었다면 형평사의 설립은 불가능 했을 것이다. 형평사가 벌인 형평운동이 오늘날 인권운동의 효시로 평가받는 이유다.

 
2011년 진주문화사랑모임에서 세운 ‘소년운동 발상지’ 기념비. ‘진주는 소년운동 발상지이다’ 라고 새긴 기념비 아래에 잡지 ‘어린이’의 창간호 내용을 인용해 “…사회적 회합의 성질을 띄인 소년회가 우리 조선에 생기기는 경상남도 진주에서 조직된 진주소년회가 맨처음이었습니다”라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더 나은 ‘미래’=소년운동 발상지

진주는 소년운동의 발상지다. 일제강점기 애국지사들은 나라의 미래인 소년(소녀)들을 제대로 키우자는 소년운동에 뛰어들었다.

1920년 조선에서 소년회가 가장 먼저 조직된 곳이 바로 진주다. 진주소년회 설립에 앞장선 아동문학가 강영호 선생이 활동한 색동회가 ‘어린이날’을 제정하고 이후 1923년 소파 방정환이 우리나라 최초의 아동문학 잡지인 ‘어린이’를 창간하게 된다.

진주사람들은 여성 교육에도 적극 참여했다. 1925년 현 진주고와 진주여고의 전신인 진주공립고등보통학교와 일신여자고등보통학교가 설립됐다.

진주여고는 대하소설 토지의 박경리 작가, 이성자 화백 등 다수의 인물을 배출했다. 일신여고와 진주고보에서 분리된 진주여중과 진주중은 내년에 도내 중학교 최초로 개교 100주년을 맞는다.

김중섭 경상국립대학교 사회학과 명예교수는 “진주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은 나라를 일제에 빼앗기는 과정에서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진주 사람들이 가진 저항정신과 역동성을 잘 보여준다”라고 말했다.

 
1923년 5월 13일 형평사 창립 축하식이 열린 곳을 기념해 세운 조형물. 진주극장 자리였던 이 곳은 대형건물이 들어서면서 본래 있던 기념비를 없애고 기념비의 문구를 조형물에 옮겨 새겼다. 한때 번화했던 원도심 중심이지만 광고물 부착의 흔적 등이 남아 기념비의 의미가 퇴색하고 있다.

◇진주에 필요한 기억의 공간

진주에서 일어났던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은 그동안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지금은 ‘인권’이라는 개념이 보편적 단어로 사용되고 있지만 이전에는 정치적 성향을 뜻하는 색깔론으로 비치기도 했다. 이런 오해들 때문에 관련 단체들이 활동하는데 우여곡절도 많았다.

다른 지역에서는 정치권과 연계해서 지역의 역사적 사건들을 국비 지원을 받는 행사로 승화시키는 경우가 많은데 우직한 진주 사람들은 그런 계산에 익숙하지 않았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그래서 이들 기억의 자산들은 진주 사람들 조차 제대로 아는 이가 많지 않은 게 현실이다. 관리가 되지 않아 오래된 기념비는 풍화 작용으로 원형을 잃어가고 안내 표지판도 없이 홀로 서 있거나 제 장소가 아닌 곳에 흩어져 있다.

진주라는 도시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서라도 이들 기억의 자산을 관리할 공간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꾸준히 제기된 이유다.

그런 점에서 진주시가 2028년 건립할 예정인 진주역사관이 진주 사람들의 자긍심 고취에 큰 역할을 할 수 있을지 관심을 끈다.

김덕환 경상국립대학교 진주학연구센터장은 “천년 도시 진주를 채우는 콘텐츠가 많은데 사람들은 진주성 아니면 논개 정도만 떠 올린다”라면서 “진주가 가지고 있는 유무형의 도시 자산들을 적극적으로 알려 나가는 작업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글=임명진기자·사진=김지원기자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진주 사람은 기억해야 할 강재순 가족

불의에 항거하고 자신보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돕는 진주사람들의 기질을 ‘진주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진주정신’을 실천한 대표적인 사례가 강재순(1845~1929) 가족을 꼽을 수 있다.

부유한 지주 출신에다 대안면장을 지낸 강재순 선생은 일제의 침략에 맞서 1910년 뜻있는 이들과 진주 최초의 사립학교인 진주 봉양학교(봉래초등학교 전신)를 건립했다.

그의 처인 이씨(1863~1916) 부인은 가뭄과 홍수로 많은 이재민들이 생겨나자 곳간을 열어 그들을 도왔다. 주민들이 그녀의 사후 공덕비를 세우며 은혜를 기릴 정도로 인망이 두터웠다.

강재순 부부는 모두 4명의 아들을 두었다. 장남은 형평운동가 강상호, 둘째는 강기호, 셋째는 아동문학가 강영호, 넷째는 ‘촉석루의 여명’ 등의 작품에서 항일 정신을 그려낸 당대 천재화가로 명성을 떨친 강신호다.

둘째 강기호는 일찍 작고해 그 행적이 알려진 바가 없지만 나머지 3형제는 각각의 분야에서 명성을 떨쳤다. 강상호, 강영호 선생은 항일운동에도 뛰어들어 온갖 고초를 겪었다.

그들 가족의 말년은 편치 않았다.

강신호는 불과 24세의 나이에 불의의 사고사를 당했으며, 강상호 선생과 강영호 선생은 해방 이후 보도연맹 사건에 억울하게 연루돼 강상호 선생은 간신히 목숨을 건졌지만, 강영호 선생은 그러지 못했다.

그들 가족 중에서 정부 포상을 받은 이는 2005년 대통령 표창으로 애국지사로 추서된 강상호 선생이 유일하다.

진주에 자랑스러운 역사의 기억을 남겨준 이들 가족의 희생이 제대로 평가받아야 한다.

왼쪽 시계방향으로 강재순 선생과 장남 강상호, 막내 강신호, 셋째 강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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