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이 남긴 사상, 진주정신으로 이어져
‘경상도 진주에 사는 백성 조식은 진실로 두려운 마음으로 삼가 절하고 머리 조아리며 주상전하께 아룁니다.’
간곡한 어투로 시작되는 이 상소는 남명 조식(1501~1572)이 68세가 되던 해인 1568년에 갓 즉위한 임금, 선조에게 올린 상소이다.
‘아전들이 믿는 데가 없다면 어찌 이렇게 기탄없이 멋대로 날뛸 수 있겠습니까. 이런 아전들과 한통속이 돼 뒤를 봐주고 있는 관리들은 과연 어떤 사람인지요? 전하께서 벌컥 노하셔서 기강을 떨쳐 재상을 불러 모아 그 원인을 따져 묻고 결단해서 나쁜 무리를 완전히 제거하고 백성들의 뜻을 존중해야 할 것입니다’
상소에서 남명은 지방관을 보좌하는 서리(아전)들의 백성에 대한 가혹한 수탈과 횡포가 극에 달해 나라가 망할 지경에 처해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남명의 경고는 적중했다. 그로부터 300여 년 뒤, 1862년 남명이 상소를 올린 산청 단성에서 관리들의 부정부패에 분노한 농민들의 항쟁이 시작해 전국으로 확산됐다. 남명이 망국을 이야기한 서리의 횡포, 그 상소를 올린 단성에서 농민항쟁이 촉발했으니 참으로 선견지명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우리가 위인을 기리는 것은 그들이 살아온 삶에서 교훈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우리가 위인들의 동상을 세우는 이유일 것이다.
◇난세의 시대, 왕에게 목숨을 건 직언
남명 조식은 평생 관직에 나아간 적이 없다. 그럼에도 조선왕조실록에 수백 회에 걸쳐 그의 기록이 남겨져 있고 오늘날 진주 사람들이 말하는 ‘진주정신’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그가 살다 간 시기는 정치적 혼란이 극심했던, 이른바 ‘사화의 시대’였다. 조선의 전성기인 성종 시대를 지나 연산군 무오사화(1498)와 갑자사화(1504), 중종 기묘사화(1519), 명종 을사사화(1545)가 연이어 일어나면서 수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다.
여기에 밖으로는 왜구들이 1510년 삼포왜란, 1544년 사량진왜변, 1555년 을묘년에 또 다시 대규모로 침략하면서 나라 안팎으로 큰 고통을 겪었다.
이처럼 어지러운 시대에 남명은 현실 정치에 대한 강한 부정과 실망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그의 나이 55세가 되던 해, 당시 임금인 명종에게 한 통의 상소를 올렸다. 자신을 단성 현감으로 임명한 임금에게 곧바로 사직을 하겠다는 상소였다. 그런데 그 내용이 가히 충격적이었다.
‘전하의 국사가 이미 잘못되고 나라의 근본이 이미 망하여 천의가 이미 떠나갔고 인심도 이미 떠났습니다. 외직의 신하들은 백성들을 갉아먹기를 마치 늑대가 들판에서 날뛰는 듯하고 있습니다’
‘자전(문정왕후)께서는 생각이 깊으시지만,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으시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단지 선왕의 한낱 외로운 후사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심을 무엇으로 감당해 내며 무엇으로 수습하겠습니까’
거듭되는 실정에 임금을 어린 고아로, 외척을 동원해 권력을 장악한 모후인 문정왕후는 과부로 지칭하며 강도 높게 비판한 것이다.
남명의 상소를 받아본 명종이 극도로 분노해 불경죄를 물어 처벌하려고 했지만, 조정 안팎에서 남명을 구원하는 목소리가 쏟아지면서 제 뜻대로 처벌하지 못했다.
◇왜적의 목을 베어라
남명은 자신의 학문이 현실에 쓰임이 있기를 바랬다. 실천하지 않는 학문을 배격했으며 여러 학문의 장점을 수용하려고 노력했다. 특히 국방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는데, 남명이 69세의 나이에 제자들에게 남긴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대들에게 견해를 묻노라. 섬 오랑캐들이 난을 일으키고 있다. 풀어주고 길러주는 은혜는 날로 더해가거늘 멋대로 날뛰어 비할 수 없는 재난을 일으킨다. 나라를 어지럽히는 왜적에게 예물을 내리라고 명령하는 것이 가당키나 한단 말인가? 왜적의 사신이라면 목을 베어야지 사신 대접까지 해줄 이유가 있겠는가? 제압하기 어려운 형세가 있어 평화롭게 회유되지 않으니 그 침입에 대비해야 할 것이다. 왜적을 막아낼 방책이 없겠는가? 제군들의 의견을 듣고 싶다.’
남명의 현실에 대한 인식은 우리에게 ‘유비무환’의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남명은 왜적들을 달래기만 하는 조정에 강한 불신을 드러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학문 뿐만 아니라 병법까지 가르쳤다.
그의 사후 20년 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남명의 제자들은 대거 의병을 일으켰다. 곽재우, 정인홍, 김면 등 영남 3대 의병장을 비롯해 50여 명이 넘는 남명의 제자들이 의병장으로 활약했다.
남명은 칼과 방울을 늘 몸에 차고 다녔다. 칼에는 ‘내명자경 외단자의(內明者敬 外斷者義)’라는 글을 새기고 끊임없이 자신을 경계하고, ‘성성자’라는 방울은 소리가 울릴 때마다 나태해지거나 교만해지는 자신을 깨우치게 하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
남명은 ‘경의 사상’을 강조했는데 여기서 ‘경(敬)’은 내적 수양, 목숨을 걸고 수양하려는 자세를 말한다. ‘의(義)’는 불의에 항거하고, 옳은 일에 결연히 일어나려는 생각을 실천하는 것을 뜻한다.
진주성 전투, 의병항쟁, 농민항쟁, 형평운동, 민주항쟁에 이르기까지 진주에서 일어난 불의에 항거한 역사적 사건들이 남명과 무관치 않다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김영기 (사)남명사랑 상임대표는 “조식 선생은 난세의 시대에 태어나 현실에 대한 깊은 통찰력으로 원인을 찾고 그 처방으로 경의사상을 강조하면서 스스로 실천하는 본보기가 되어 준 민족의 스승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말했다.
◇진주다움을 형성하다
그의 사상과 학문은 후대에 잘 알려지지 못했다. 의병장으로 활약한 남명의 제자들이 광해군 때 정계에 대거 진출했지만, 인조반정으로 한순간에 몰락했기 때문이다.
잊혀졌던 남명의 사상이 오늘날 재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뜻있는 이들의 각고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현재 경상국립대학교 남명학연구소, 한국선비문화연구원을 비롯한 여러 기관에서 남명에 관한 연구와 토론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불의에 항거한 진주정신을 남명의 ‘경의 사상’에서 찾는 연구부터 시작해 다양한 학문적 토론과 오늘날 우리에게 미친 영향을 심층적으로 조명하는 노력이 펼쳐지고 있다.
남명이 재평가받는 이유는 그가 우리 역사에 끼친 영향이 결코 적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라를 위한 충정과 백성을 위한 애민 사상, 다양한 사상을 포용한 실천 유학은 커다란 화두를 던져주고 있다.
우리가 남명을 배우고 기억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남명은 이제 진주와 경남을 넘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대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김경수 한국선비문화연구원 책임연구원은 “경남 동부의 상무적인 정신과 서부의 숭문적인 정신이 남명을 통해서 하나로 결합했고, 그것이 ‘경과 의’ 라는 두 가지 개념으로 드러나게 됐다”라면서 “옳지 않으면 목소리를 내고, 행동으로 옮기고, 그러한 불의에 저항하는 남명의 사상이 진주정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말했다.
글=임명진기자·사진=김지원기자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당대 학문적 라이벌, 남명과 퇴계
남명 조식(1501~1572)과 퇴계 이황(1501~1571)은 동시대에 태어나 비슷한 시기에 생애를 마쳤다. 퇴계의 근거지인 경상좌도(안동)와 남명의 근거지 경상우도(진주)를 빗대, ‘좌 퇴계, 우 남명’으로 불렸다. 이들의 제자들은 남명학파와 퇴계학파를 형성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현실 인식, 외교 정책, 학문적 방향 등 여러 면에서 너무나 달랐다. 실천 유학을 강조하면서 타 학문을 적극 수용한 남명과는 달리 퇴계는 정통 성리학의 이론적 확립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를 두고 후대의 실학자, 성호 이익 선생은 저서 ‘성호사설’에서 “경상좌도는 인을 주로 하고, 경상우도는 의를 주로 한다”라는 말로 차이점을 설명하고 있다.
■백성을 두려워 하라
남명이 지은 ‘민암부’는 파격적이고 놀랍다. 더 이상 백성을 착취의 대상으로 여기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배는 물 때문에 가기도 하지만 물 때문에 뒤집히기도 한다네
백성이 물과 같다는 소리 옛날부터 있어 왔다네
백성들이 임금을 떠받들기도 하지만 백성들이 나라를 뒤집기도 한다네’-민암부 중
간곡한 어투로 시작되는 이 상소는 남명 조식(1501~1572)이 68세가 되던 해인 1568년에 갓 즉위한 임금, 선조에게 올린 상소이다.
‘아전들이 믿는 데가 없다면 어찌 이렇게 기탄없이 멋대로 날뛸 수 있겠습니까. 이런 아전들과 한통속이 돼 뒤를 봐주고 있는 관리들은 과연 어떤 사람인지요? 전하께서 벌컥 노하셔서 기강을 떨쳐 재상을 불러 모아 그 원인을 따져 묻고 결단해서 나쁜 무리를 완전히 제거하고 백성들의 뜻을 존중해야 할 것입니다’
상소에서 남명은 지방관을 보좌하는 서리(아전)들의 백성에 대한 가혹한 수탈과 횡포가 극에 달해 나라가 망할 지경에 처해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남명의 경고는 적중했다. 그로부터 300여 년 뒤, 1862년 남명이 상소를 올린 산청 단성에서 관리들의 부정부패에 분노한 농민들의 항쟁이 시작해 전국으로 확산됐다. 남명이 망국을 이야기한 서리의 횡포, 그 상소를 올린 단성에서 농민항쟁이 촉발했으니 참으로 선견지명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우리가 위인을 기리는 것은 그들이 살아온 삶에서 교훈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우리가 위인들의 동상을 세우는 이유일 것이다.
◇난세의 시대, 왕에게 목숨을 건 직언
남명 조식은 평생 관직에 나아간 적이 없다. 그럼에도 조선왕조실록에 수백 회에 걸쳐 그의 기록이 남겨져 있고 오늘날 진주 사람들이 말하는 ‘진주정신’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그가 살다 간 시기는 정치적 혼란이 극심했던, 이른바 ‘사화의 시대’였다. 조선의 전성기인 성종 시대를 지나 연산군 무오사화(1498)와 갑자사화(1504), 중종 기묘사화(1519), 명종 을사사화(1545)가 연이어 일어나면서 수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다.
여기에 밖으로는 왜구들이 1510년 삼포왜란, 1544년 사량진왜변, 1555년 을묘년에 또 다시 대규모로 침략하면서 나라 안팎으로 큰 고통을 겪었다.
이처럼 어지러운 시대에 남명은 현실 정치에 대한 강한 부정과 실망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그의 나이 55세가 되던 해, 당시 임금인 명종에게 한 통의 상소를 올렸다. 자신을 단성 현감으로 임명한 임금에게 곧바로 사직을 하겠다는 상소였다. 그런데 그 내용이 가히 충격적이었다.
‘전하의 국사가 이미 잘못되고 나라의 근본이 이미 망하여 천의가 이미 떠나갔고 인심도 이미 떠났습니다. 외직의 신하들은 백성들을 갉아먹기를 마치 늑대가 들판에서 날뛰는 듯하고 있습니다’
‘자전(문정왕후)께서는 생각이 깊으시지만,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으시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단지 선왕의 한낱 외로운 후사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심을 무엇으로 감당해 내며 무엇으로 수습하겠습니까’
거듭되는 실정에 임금을 어린 고아로, 외척을 동원해 권력을 장악한 모후인 문정왕후는 과부로 지칭하며 강도 높게 비판한 것이다.
남명의 상소를 받아본 명종이 극도로 분노해 불경죄를 물어 처벌하려고 했지만, 조정 안팎에서 남명을 구원하는 목소리가 쏟아지면서 제 뜻대로 처벌하지 못했다.
◇왜적의 목을 베어라
남명은 자신의 학문이 현실에 쓰임이 있기를 바랬다. 실천하지 않는 학문을 배격했으며 여러 학문의 장점을 수용하려고 노력했다. 특히 국방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는데, 남명이 69세의 나이에 제자들에게 남긴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대들에게 견해를 묻노라. 섬 오랑캐들이 난을 일으키고 있다. 풀어주고 길러주는 은혜는 날로 더해가거늘 멋대로 날뛰어 비할 수 없는 재난을 일으킨다. 나라를 어지럽히는 왜적에게 예물을 내리라고 명령하는 것이 가당키나 한단 말인가? 왜적의 사신이라면 목을 베어야지 사신 대접까지 해줄 이유가 있겠는가? 제압하기 어려운 형세가 있어 평화롭게 회유되지 않으니 그 침입에 대비해야 할 것이다. 왜적을 막아낼 방책이 없겠는가? 제군들의 의견을 듣고 싶다.’
남명의 현실에 대한 인식은 우리에게 ‘유비무환’의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남명은 왜적들을 달래기만 하는 조정에 강한 불신을 드러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학문 뿐만 아니라 병법까지 가르쳤다.
그의 사후 20년 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남명의 제자들은 대거 의병을 일으켰다. 곽재우, 정인홍, 김면 등 영남 3대 의병장을 비롯해 50여 명이 넘는 남명의 제자들이 의병장으로 활약했다.
남명은 칼과 방울을 늘 몸에 차고 다녔다. 칼에는 ‘내명자경 외단자의(內明者敬 外斷者義)’라는 글을 새기고 끊임없이 자신을 경계하고, ‘성성자’라는 방울은 소리가 울릴 때마다 나태해지거나 교만해지는 자신을 깨우치게 하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
진주성 전투, 의병항쟁, 농민항쟁, 형평운동, 민주항쟁에 이르기까지 진주에서 일어난 불의에 항거한 역사적 사건들이 남명과 무관치 않다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김영기 (사)남명사랑 상임대표는 “조식 선생은 난세의 시대에 태어나 현실에 대한 깊은 통찰력으로 원인을 찾고 그 처방으로 경의사상을 강조하면서 스스로 실천하는 본보기가 되어 준 민족의 스승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말했다.
◇진주다움을 형성하다
그의 사상과 학문은 후대에 잘 알려지지 못했다. 의병장으로 활약한 남명의 제자들이 광해군 때 정계에 대거 진출했지만, 인조반정으로 한순간에 몰락했기 때문이다.
잊혀졌던 남명의 사상이 오늘날 재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뜻있는 이들의 각고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현재 경상국립대학교 남명학연구소, 한국선비문화연구원을 비롯한 여러 기관에서 남명에 관한 연구와 토론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불의에 항거한 진주정신을 남명의 ‘경의 사상’에서 찾는 연구부터 시작해 다양한 학문적 토론과 오늘날 우리에게 미친 영향을 심층적으로 조명하는 노력이 펼쳐지고 있다.
남명이 재평가받는 이유는 그가 우리 역사에 끼친 영향이 결코 적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라를 위한 충정과 백성을 위한 애민 사상, 다양한 사상을 포용한 실천 유학은 커다란 화두를 던져주고 있다.
우리가 남명을 배우고 기억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남명은 이제 진주와 경남을 넘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대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김경수 한국선비문화연구원 책임연구원은 “경남 동부의 상무적인 정신과 서부의 숭문적인 정신이 남명을 통해서 하나로 결합했고, 그것이 ‘경과 의’ 라는 두 가지 개념으로 드러나게 됐다”라면서 “옳지 않으면 목소리를 내고, 행동으로 옮기고, 그러한 불의에 저항하는 남명의 사상이 진주정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말했다.
글=임명진기자·사진=김지원기자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당대 학문적 라이벌, 남명과 퇴계
남명 조식(1501~1572)과 퇴계 이황(1501~1571)은 동시대에 태어나 비슷한 시기에 생애를 마쳤다. 퇴계의 근거지인 경상좌도(안동)와 남명의 근거지 경상우도(진주)를 빗대, ‘좌 퇴계, 우 남명’으로 불렸다. 이들의 제자들은 남명학파와 퇴계학파를 형성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현실 인식, 외교 정책, 학문적 방향 등 여러 면에서 너무나 달랐다. 실천 유학을 강조하면서 타 학문을 적극 수용한 남명과는 달리 퇴계는 정통 성리학의 이론적 확립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를 두고 후대의 실학자, 성호 이익 선생은 저서 ‘성호사설’에서 “경상좌도는 인을 주로 하고, 경상우도는 의를 주로 한다”라는 말로 차이점을 설명하고 있다.
■백성을 두려워 하라
남명이 지은 ‘민암부’는 파격적이고 놀랍다. 더 이상 백성을 착취의 대상으로 여기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배는 물 때문에 가기도 하지만 물 때문에 뒤집히기도 한다네
백성이 물과 같다는 소리 옛날부터 있어 왔다네
백성들이 임금을 떠받들기도 하지만 백성들이 나라를 뒤집기도 한다네’-민암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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