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저편 <7>
2012-03-29 이해선
“괜찮아요?”
화성댁이 그냥 가긴 아무래도 미안했는지 발걸음을 대문께로 당겨가면서 헝클어진 여주댁의 머리를 곁눈질했다.
“괜찮아요. 민숙 어머니는??요?”
남몰래 쌓인 한이 한 움큼의 눈물로 왈칵 쏟아져 나오는 바람에 여주댁은 목멘 소리로 말꼬리를 흐렸다.
“언젠가 좋은 세상이 오겠지요. 그 날이 오면 오늘 일을 웃으면서 말할 수 있겠지요.”
화성댁은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빗어 넘기며 비녀를 찾기 위해 땅바닥을 눈으로 더듬었다.
“좋은 세상이 오기는 꼭 오겠죠?”
비녀 두 개를 먼저 찾은 여주댁은 허리를 굽혀 번갈아 주워선 하나를 상대 앞으로 내밀며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오고말고요. 꼭 와야지요. 꼭 올 겁니다. 와야지요.”
주문을 외듯 중얼거리며 비녀를 받아든 화성댁은 치마에 쓱쓱 문지르며 대문간으로 몸을 돌렸다.
발걸음을 대문으로 당겨가다 말고 화성댁은 목을 넌지시 뒤로 돌렸다. ‘이 참에 말해 둘까?’ 민숙이가 진석이를 친 오라비처럼 따르는 것 같아서 둘이 만나곤 하는 건 마지못해 용납해 주고 있을 뿐 결혼시킬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다고 못 박아 두고 싶은 것이었다.
‘더럽게 돌아가는 세상, 그쪽이나 나나 처량하긴 매 한가지 아닌가?’ 순사의 눈을 속이기 위해 각본 없는 연극을 펼칠 수밖에 없었지만 화성댁은 여주댁의 머리칼을 먼저 움켜잡았다는 사실이 못내 가슴에 갉작였다. 같은 동네에 사는 터에 오늘 꼭 말하라고 하는 법도 없었다.
“이리 와서 잠깐 앉으세요.”
여주댁은 마루로 손짓하며 화성댁을 곁눈질했다. 민숙이를 며느릿감으로 점찍어두고 있는 터였다. 평소에 대문 밖 출입을 잘 하지 않고 있어서 동네사람들과 얼굴을 가까이 할 기회가 없었다. 입에 거품까지 물고 한바탕한 뒤풀이 소제론 적당하진 않지만 만난 김에 둘을 맺어주면 어떤지 넌지시 뜻을 비쳐보고 싶은 거였다.
“순사 놈 오는 거 보고 밭을 매다 말고 꽁지에 불붙은 사람처럼 달려왔는데 궁둥이를 붙이고 할 여유가 있겠어요?”
화성댁은 목을 이쪽으로 돌리지도 않고 한탄하듯 중얼거렸다. 사실 밭에 다시 나가고 싶은 건 아니었다. 기운이 다 빠져버린 온몸을 허탈감이 짓누르고 있어서 그냥 드러눕고 싶을 뿐이었다.
정자나무 밑을 지나가던 순사는 무슨 생각에 감전된 듯 눈을 날카롭게 번득였다. 두 여자가 엉켜 싸우던 장면을 되짚으며 비밀스러움을 감지한 듯 자전거에서 내렸다. 의혹이 가득한 얼굴로 목을 뒤로 천천히 돌렸다.
‘속임수였어!’ 순사는 날쌘 동작으로 자전거 위에 도로 올라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