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저편 <28>

2012-03-29     이해선
 “아주머니 안녕하세요?”

 형식은 혀가 꼬부라진 소리로 그래도 인사는 챙겼다.   

 “한잔 했으면 조용히 집에 가서 쉬어야지 예까지 와서 소란을 피우고 그러면 되겠느냐?”

 놈이 어른은 알아본다고 판단한 여주댁은 별안간 목소리를 낮추어 부드럽게 타일렀다. 

 “민숙 씨는 제 색시예요. 돌려주세요. 제발요, 아주머니 예?”

 형식은 두 손을 싹싹 비비며 사정했다.

 “어디서 감히 남의 새아기 이름을 함부로 입에 올려?”

 “누난 여기 있으면 안 돼요.”

 “당장 돌아가, 당장!”

 여주댁은 몸을 돌렸다.

 “누나가 불행해지는 걸 보고 있을 수 없어요.”

 형식은 무릎을 꿇었다.

 ‘누나가 문둥병자와 같이 사는 꼴을 보고 있을 순 없습니다.’

 그는 입안에서 뱅글뱅글 도는 이 말을 꾹 참고 있었다.

 “뭐야? 누가 불행해진다고?”

 방으로 들어가려다 말고 여주댁은 몸을 도로 돌렸다. 차라리 보지 말았으면 좋았을 놈의 마음이 빤히 들여다보여서인지 안면이 비참하게 일그러졌다. 

 ‘육시랄 놈, 천금 같은 내 아들을 문둥병자 취급해!’

 그녀는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것을 느끼며 불끈 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당장 놈을 때려죽이고 싶었다.

 “누나가요. 진석이 형 때문에요. 누난 절대로 불행해지면 안 돼요.”

 “그래도 이 놈이!”

 맨발로 마당에 내려선 여주댁은 댓돌 위에 있던 신발을 집어 들었다.

 “왜 때려요, 왜?”

 신발로 머리와 어깨를 얻어맞으며 형식은 울화를 터뜨렸다.

 “천하에 버르장머리 없는 놈! 어디 어른 앞에서 눈을 똑바로 뜨고 대드는 것이야?”

 “흥, 누구긴요? 문둥이 싸모님이죠.”

 술기운에 화가 더욱 북돋우진 형식은 기어이 하지 말았어야 할 말을 대놓고 해 버렸다.

 “뭐, 뭐, 뭐 이놈이!”

 여주댁은 멍한 얼굴로 뒷머리를 감쌌다.

 “형식아, 어른께 이게 무슨 짓이니?”

 방안에서 훔쳐보고 있던 민숙은 맨발로 마당까지 내려와 무서운 눈초리로 형식을 노려보았다.

 “누나, 나랑 같이 가. 여기 있으면 안 돼. 누나가 불행해지는 거 난 못 봐. 못 본단 말야.”

 놈은 울음 섞인 목소리로 애걸했다.

 “새악아, 홀몸도 아닌데 왜 나왔니? 어서 들어가 있어.”

 마음을 좀 가다듬은 여주댁은 ‘홀몸도 아닌데’에 일부러 힘을 주어 말하며 애틋한 눈길로 민숙을 보았다.

 “어머님, 들어가세요. 철딱서니 없는 이 녀석은 제가 돌려보낼게요.”

 “민숙 씨!”

 어린애 취급을 당하는 것이 싫어서 형식은 있는 대로 목청을 높였다.

 “여기 귀먹은 사람 있니?”

 영 어리게만 보이는 놈이 까불고 있는 꼴을 보면서 민숙은 속이 뒤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