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저편 <80>

2012-04-24     경남일보
의사는 의혹이 가득한 눈으로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형식은 자신의 엉덩이를 두어 번 찰싹찰싹 친 후 주사바늘을 꼽는 시늉까지 해 보이며 아주 능숙한 체까지 했다.

도리 없이 의사는 페니실린 주사약과 바늘을 형식의 손에 쥐어주었다.

태양이 눈부신 빛을 조금씩 거둬들이며 뒷산마루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헐벗은 뒷산은 석양에 물든 맨몸으로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산그늘에 안긴 학동에도 노을빛이 은근슬쩍 겹치면서 해거름의 분위기가 익어가고 있었다.

저녁밥을 다 지어놓고 마루에 걸터앉은 정자는 바람 소리만 귓전에 스쳐도 사립문으로 눈을 퉁기곤 하며 형식의 얼굴을 떠올렸다.

차라리 구름 사이로 들락날락하는 밤하늘의 달님을 그리워하는 편이 속편할까?

아직 얼굴도 제대로 익히지 못한 신랑이 야속하면서도 미워할 수 없는 그녀는 눈시울만 붉혔다.

‘쯧쯧, 가여운 것! 남의 귀한 딸 데려다 못할 짓을 어지간히도 시키는군.’

청승맞게 앉아 있는 손자며느리의 등을 보며 형식의 할머니는 초조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자꾸만 쓴 입을 다셨다.

‘그나저나 돌아오고도 남을 시각인데 여태 뭐하고 감감소식일까?’

노파는 넘어가는 해를 안타까이 바라보며 도리 없이 인기척을 냈다.

“시장하시죠? 저녁 먼저 차려드리겠습니다.”

정자는 얼른 일어나 몸을 노파에게로 돌렸다.

“아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꾸나. 모르긴 해도 진석이 학생이 쉽게 따라나서지 않아서 애를 좀 먹을 게야.”

노파도 사립문 밖으로 목을 길게 뺐다.

“아, 예.”

진석의 이름만 나오면 정자는 왠지 마음이 편안해지고 있었다.

“새아긴 배고프지 않냐? 우리 먼저 먹고 치울까?”

아무래도 손자가 빨리 나타날 것 같지 않아서 노파는 마음을 바꾸었다.

“아닙니다. 전 괜찮습니다. 어두워지기 전에 물 항아리 채워둘게요.”

정자는 물동이를 들고 도망을 치듯 얼른 집을 빠져나갔다.

‘서방님, 오고 있기는 한가요?’

정자는 허공에다 대고 물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참아내야 한다고 몇 번씩이나 강조하던 친정어머니의 모습이 나타났다.

쪼르르 달려 나온 눈물에 근심 가득한 그 얼굴이 잠겼다.

아직은 너무 철없는 어린 남동생의 얼굴도 눈물에 아롱거리는 망막의 파문 속에서 일렁거렸다.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거야?’

정자는 화성댁의 집으로 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은근히 놀랐다.

‘한번 가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