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저편 <113>

2012-06-12     경남일보
“허, 그랬으면 오죽이나 좋겠슈?”

노파는 당장 달려가서 손자를 끌고 와야 한다고 의지를 확실하게 밝혔다.

“할머님, 한번 믿어봅시다.”

그리고 진석은 뇌리를 스치는 불길한 생각을 떨어버리듯 머리를 짧게 가로 저었다. 아닌 게 아니라 녀석이 이 밤중에 아주 먼 곳으로 달아나 버린다면 무슨 수로 찾아내겠는가?

“우리 손자 어디 있는지 그것만 가르쳐 줘유. 같이 가 달라는 부탁 같은 건 하지 않을 테니까유.”

급기야 노파는 서운한 마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볼멘소리를 냈다.

“지금 곧 통행금지가 될 텐데 어떡하시려고? 내일 날이 밝는 대로 달려가서 꼭 데려오겠습니다.”

진석은 결근할 궁리까지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새끼 하나 때문에 한 자라도 더 배우겠다고 학교 온 남의 자식들을 놀게 할 수는 없쥬. 경찰관한테 부탁을 해 보려구유.”

진석의 호의에 금방 서운한 마음이 풀리고 만 노파는 눈시울까지 붉히고 있었다.

“할머님, 그건 절대로 안 됩니다.”

진석은 부지중에 목청을 높였다.

“안 되다니유?”

노파는 노파대로 진석을 향하여 놀란 눈을 홉떴다.

“아이한데 반항심을 심어줄 수 있습니다. 오늘 낮에 저와 만났는데 밤중에 경찰이 들이닥쳐 보세요. 두 번 다시 이 담임을 믿지 않으려 할 것이고 오기가 받쳐서라도 엇나가려고 할 겁니다. 반강제로 아이를 집에만 데려다 놓으면 뭐하겠습니까? 언제 또 집을 뛰쳐나갈지 모르는데요. 스스로 마음을 정리할 때까지 시간을 줘 보는 것이 나을 성 싶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설명한 진석은 복잡한 마음을 달래듯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가 길게 내뿜었다.

‘필중아, 약속은 꼭 지켜야 해. 누가 뭐래도 난 널 믿을 것이다.’

비밀스런 대화를 날숨으로 버무렸다.

캄캄한 방안에 혼자 남은 필중은 또 벌떡 일어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친구들을 만날 자신이 없었다. 더 자세히 말하면 그들 속에 끼어들 자신이 없었다. 필중은 눈앞에 돋아나는 담임의 모습을 피해 목을 옆으로 돌렸다.

녀석은 기어이 방문 고리를 잡았다. 담임에게 노출된 이상 이곳 암자는 더 이상 숨어 있을 곳이 못 된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아이고 아이고, 사람들아, 이 늙은이 소원 좀 풀어줘유.”

노파는 넋이 나가버린 얼굴로 마당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진정하세요. 낼 새벽에 제가 할머님을 모시고 같이 가겠습니다.”

보고만 있던 민숙이가 나서서 노파를 달랬다.

“큰일 날 소리! 어디 여자끼리 산엘 가겠다고 그래?”

진석은 놀란 눈으로 민숙을 흘겼다.

“허허, 낼 새벽? 그 놈은 이미 그곳에 없을 껴.”

한탄스레 중얼거린 노파는 삶의 의욕을 완전히 상실한 사람이 되어 그대로 마당에 드러누워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