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오늘의 저편

2012-07-03     경남일보
다음날 아침 민숙은 진석에게 학동으로 가서 살자는 뜻을 비쳤다. 밤새 소록도로 끌려가는 남편의 모습에 시달리며 가위눌렸던 것이다. 그 동안 혼자 끙끙 앓았을 남편의 마음을 헤아려 먼저 말을 꺼냈다.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리니?”

넥타이를 꺼내다 말고 진석은 눈을 홉떴다.

“당신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요.”

발등의 붉은 반점을 보았다고 말하려다 입이 떨어지지 않아서 민숙은 둘러댔다.

“내가? 힘들 일이 전혀 없는데?”

“정말이세요?”

“정말이지 않구. 난 말야. 아이들만 보면 없던 힘도 생기고 있던 힘은 막 솟구치는 체질이잖아?”

진석은 오늘따라 기분이 좋은지 싱겁게 씩 웃기까지 했다.

“저한테는 숨기지 않아도 되잖아요?”

민숙은 그런 남편의 모습이 더욱 가여워서 눈시울을 붉혔다.

“내가 뭘 숨겼다고 이러니? 말해 봐. 무슨 일이야?”

“오빠 발등 보았어요.”

“발등? 내 발등이 뭐가 어때서? 아니 이건?”

반사적으로 목을 아래로 내린 진석의 두 눈은 붉은 반점에 바로 꽂혔다.

“모, 몰랐어요?”

민숙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리고 말 것만 같은 얼굴이 되었다.

“휴우, 아냐. 어제 학교에서 책을 옮기다 떨어뜨렸어.”

다음 순간 진석은 안도의 한숨까지 쉬며 민숙의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민숙이도 덩달아 안도의 한숨을 쉬며 울려다간 급히 웃었다.

1950년 4월, 야산의 진달래가 흐드러진 분홍빛 웃음으로 봄을 익혀가고 있었다.

빨갱이가 쳐들어올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고는 했다. 귀담아 듣는 이가 몇이나 될

까? 사람들은 목구멍에 풀칠이라도 하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학동 뒷산으로 올라간 화성댁은 진달래를 한 아름 꺾어서 내려 왔다. 딸은 진달래를 살짝 얹고 지진 부꾸미를 유난히 좋아했다.

“어머니 아기가 또 배를 차요.”

사립문으로 들어서는 화성댁을 본 민숙은 배를 만지며 호들갑을 떨었다. 결혼한 지 5년 만에 아기를 가진 그녀는 학동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래! 튼실한 사내아이가 나올 모양이구나!”

화성댁은 이렇게 매번 같은 말을 하며 환하게 웃었다.

갓 임신한 딸이 여주댁의 손에 이끌려 왔을 때 화성댁은 너무 좋아서 눈물까지 찔끔거리며 웃었다. 도무지 들려오지 않는 외손 소식을 기다리며 새벽마다 치성까지 올리고 있던 차였기에.

“이제 저 서울 갈래요.”

민숙은 금방이라도 길을 나서겠다는 듯 들떴다. 여주댁과 약속을 하였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