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선비들의 과거길 鳥嶺

이수기 (논설고문)

2012-07-05     경남일보
문경새재(조령·鳥嶺)는 영남의 우도·좌도유생들에게는 출세의 상징과 과거길의 대명사였다. 문경새재는 영남에서 한양을 가는데 가장 짧은 길이었다. 동래에서 한양을 갈 때 문경새재는 14일, 죽령은 15일 추풍령은 16일이 걸렸다. 새재란 이름엔 몇 가지 유래가 있다. 풀(억새)이 우거진 고개라는 말이 있고, 하늘재와 이우리재 사이의 새(사이)재란 말도 있고, 새도 날아 넘기 힘든 고개라서 새재라는 말도 있다.

▶영남에서 한양까지는 도보로 지역에 따라 10여일에서 15일 정도 걸렸다. 한양까지 길에는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 숙박시설이다. 관리들을 위한 역, 원과 일반인을 위한 주막, 객주가 있었다. 영남대로에만 역이 30여개, 원이 165곳이나 있었다고 한다. 원이 쇠퇴하면서 주막이 번창했는데 주막에서는 술이나 밥을 먹으면 숙박료를 따로 받지 않았다.

▶조선시대 문과(지금의 고시) 최종 합격자의 평균연령은 35세로, 5살을 전후로 글을 읽기 시작, 30년 후에 과거에 합격할 수 있다. 문경새재는 선비들의 과거길이 된 것은 죽령과 추풍령이 있었지만 죽령은 ‘죽죽’ 떨어지고 추풍령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는 속설에 따라 영남선비들은 그 길은 피했다.

▶영남선비들은 문경새재를 ‘백의(白衣)’로 넘어가는 것을 예로부터 부끄럽게 여겼다. ‘백의(白衣)’ 과거 낙방, 즉 ‘홍패(과거 합격증)’를 얻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영남 유생들의 백두대간의 조령 고개에 대한 인식은 다른 지역과는 다른 면이 있었다.

▶ 평균 6만300여명이 응시, 소과 2단계(초시, 복시)와 대과 3단계(초시, 복시, 전시) 등 5단계를 거쳐 최종 선발되는 인원은 33명이었다. 평균 2000대 1의 경쟁률인 셈이다. 과거시험은 양민(평민) 이상이면 누구나 응시가 가능했으나 이는 이론상이고, 평민이 경제력 때문에 과거에 합격한 사례는 거의 없었다.

이수기·논설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