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저편 <163>

2012-08-22     경남일보
 화성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미워할 수 없는 사위가 여간 밉지 않은 탓일까. 변함없이 슬겁게 다가오는 형식을 보면서 사위삼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가 고질병처럼 재발하고 있었다. 본처에게 정을 붙이지 못하고 이 우물 저 우물 갈아치우곤 하는 것도 다 민숙이를 잊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터였다.

 ‘그러나, 이젠 정말 안 될 말이야.’

 화성댁은 순희의 얼굴을 떠올리며 목을 가로저었다. 본처에게 정을 야무지게 붙이지 못하고 있더라도 자식이 있는 사람을 탐낼 수는 없었다.

 “예, 예, 알겠습니다.”

 형식은 도망을 치듯 처갓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실컷 두들겨 맞은 화심은 번개 맞은 사람처럼 멍청한 얼굴로 형식의 곁을 떠났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뒷산의 부엉이는 주린 배를 날개 속에 감추고는 학동으로 내려와 닭장을 엿보고 있을까? 잠을 잊은 별들의 눈망울은 슬픔에 신들린 채 불면의 밤을 초롱거리고 있었다.

 처갓집으로 발길을 돌렸다가 그곳도 텅 비어 있음을 확인한 형식은 집으로 돌아와 있었다. 미곡상 일도 여간 궁금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서울로 달려가지 않고 다시 학동으로 온 그 이유는 분명했다. 아내와 딸의 소식이라도 듣고 가야한다는 그것이었다.

 뒤척거리고 있던 형식은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딱 한 번만 더 민숙의 얼굴을 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누나를 위로해 줄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는 행복한 책임감도 꿈틀거렸다.

 조심스레 대문을 흔들려다 말고 형식은 집 뒤쪽으로 갔다. 쉽게 문을 열어줄 누나가 아니었다. 담을 넘어 뒷마당으로 들어갔다.

 ‘누나! 누날 진석이 형한테 보내는 것이 아니었어.’

 뒷방 쪽에서 흘러나오는 흑흑거림을 듣고는 숨을 죽였다. 형식은 진석의 빈소 앞에 앉아 슬퍼하고 있을 민숙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다.

 “오빠, 제발 부탁이에요. 약속해 주세요. 용진의 백일까지는 나쁜 생각하지 않기로. 백일이 며칠 남지도 않았잖아요? 예? 오빠, 딱 며칠만 더 살아보는 거예요.”

 훌쩍이는 소리로 민숙은 애원하고 있었다.

 ‘뭐야? 진석이 형이 살아있다는 거야?’

 형식은 괭이걸음으로 소리 나는 쪽으로 다가갔다. 머리가 복잡해지면서 가슴이 마구 뛰고 있었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만 해.”

 진석의 목소리였다.

 형식은 길지도 않은 머리칼을 움켜잡곤 체머리를 흔들었다. 저렇게 멀쩡하게 살아 있는 사람을 죽은 사람으로 만들어야 하는 이유는 딱 한 가지밖에 없었다.  

 ‘형, 차라리 죽어버리세요.’

 진석의 존재가 민숙의 행복을 좀먹는 벌레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나환자로 평생을 숨어 지내야 했던 김 씨의 사연을 몰랐더라면 형의 상황에 대해 긍정적인 상상을 할 수 있었을까. 나환자 옆에서 평생을 썩어야 하는 누나를 생각하면 형식은 당장에 피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