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저편 <182>

2012-09-18     경남일보
 “아지매, 눈 떠 보소. 집이 어디요?”      

 지나가던 국군이 다가온 것이었다.

 “엉! 누구세~? 어마, 군인아저씨!”

 화성댁은 눈을 번쩍 떴다. 타국 땅에 뚝 떨어져 있었던 것도 아닌데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났다는 것이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양미간을 있는 대로 찌푸리던 코쟁이들을 화성댁과 국군을 번갈아 보며 또 ‘빨치젼’과 ‘쓔어’가 섞인 이런 말 저런 말들을 마구 지껄여댔다.      

 “퍼떡 대답하라 안쿠요? 집이 어디요?”

 코쟁이들이 총을 화성댁의 이마에 위협적으로 들이대자 국군은 초조한 표정으로 화를 냈다.

 “아, 우리 집? 바로 조오기??.”

 화성댁은 가까이에 있는 남의 집을 무조건 손으로 가리켰다. 엉겁결에 해 버린 거짓말이었지만 너무 잘한 것 같았다.      

 국군도 꼬부랑말이 짧았던 모양이었다. 손짓발짓 다 해가며 시내에 사는 사람들은 빨갱이가 아니라고 설명을 해댔다.

 비로소 코쟁이들은 화성댁을 겨냥했던 총구를 거둬갔다.

 화성댁은 고맙다는 인사대신 그냥 코웃음만 쳤다.

 짧은 겨울해가 서산으로 꼬리를 감추고 있었다. 화성댁은 힘없이 터덜터덜 학동으로 향했다. 전쟁 중이어서인지 어쩌다 알아낸 산파의 집은 비어 있었다.

 깨끗해지고 있던 사위의 얼굴이 눈앞에서 돋아났다.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던 딸의 얼굴이 사위의 얼굴 위에 겹쳐졌다.  

 ‘용진아, 내 아들아!’

 진석은 용진의 백일사진을 보고 있었다. 이어 다른 한손으로 들고 있던 거울 속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열 번 백번 아니 천만번을 확인해도 얼굴피부가 깨끗해지고 있었다.

 ‘꼭 낫고 말 것이다. 장모님, 고맙습니다.’

 방에서 나온 진석은 안채로 눈길을 그었다. 아내가 약을 가지고 올 시간이 지났는데도 오지 않고 있었다. 약이 다 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약간의 쓴맛 속에 베여있던 구수한 그 맛이 혀에서 살아났다.

 용진의 사진으로 또 눈을 돌린 진석은 눈시울을 붉혔다. 온몸의 피돌기가 빨라지면서 당장이라도 서울로 달려가고 싶은 충동으로 이어졌다. 벽에 걸려 있는 모자로 목이 절로 돌아갔다. 앞으로 푹 눌러쓰지 않아도 이마에 남아 있는 작은 반점 정도는 가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댓돌 옆에 쪼그리고 앉아있던 점박이가 진석을 보곤 발딱 일어났다. 칠팔 개월 전에 어미 잃고 떠도는 하얀 강아지를 민숙이가 거둬들였다. 쫑긋 선 양쪽 귀 사이에 좀 큰 검은 점이 있어서 이름이 되었다.

 ‘드디어 장모님께서 약을 가지고 오셨나 보다.’

 별안간 진석은 활짝 웃었다. 두 눈은 꼬리를 흔들며 대문간으로 가는 점박이에게 꽂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