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저편 <183>

2012-09-19     경남일보
 한밤중에 학동에 도착한 형식은 소리를 죽여 자전거에서 내렸다. 그의 시골집으로 눈길을 한 번 그은 후 곧장 민숙의 집으로 향했다. 자전거 핸들에 걸어둔 손가방이 조금씩 흔들렸다.  

 ‘어머니께서 벌써 약을 달여 오셨을까?’

 대문 두드리는 소리에 민숙이도 무조건 화성댁의 모습부터 떠올렸다.

 “아니, 형식아!”

 대문 밖에 버티고 선 형식을 보는 순간 민숙은 반가움에 겨워 손을 덥석 잡았다.

 점박이도 형식의 바짓가랑이에 코를 큼큼거리며 꼬리를 흔들었다.

 “이거 받아요.”

 형식은 손가방에서 약봉지를 꺼내 얼른 민숙의 손에 건넸다. 누나가 이렇게 반겨주기는 처음이었다. 급히 들뜬 가슴에선 쿵쿵 소리까지 나고 있었다.

 “뭔데?”

 서울 소식부터 물어보려던 민숙은 초조한 얼굴로 약봉지와 형식을 번갈아 보았다.

 “진석이 형 약이에요.”

 평소에 알고 지내는 약방에서 약을 구하려다 피난이 늦어졌고 하마터면 중공군한테 붙들려 죽을 뻔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어머, 얘! 약이라니?”

 귀가 번쩍 뜨인 민숙은 약봉지부터 빼앗듯 받아들었다. 남편의 병을 낫게 할 수만 

있다면 생판 모르는 사람의 손에 있는 것이라도 빼앗고 볼 일이었다.

 “바르는 약도 있으니까 형 빨리 나으라고 하세요.”

 “형식아, 고맙다.”

 민숙은 형식의 손을 또 덥석 잡았다.

 “꾸준히 먹고 바르면 나병도 나을 수 있대요.”

 약에 감동하는 민숙을 보며 제바람에 우쭐해진 형식은 희망적인 말까지 서슴지 않고 해주었다. 

 “어머, 정말이니?”

 말을 마치기 바쁘게 민숙은 몸을 돌렸다.

 “그럼 나 갈 게요.”

 형식은 입을 다물어버린 대문을 향하여 쓸쓸한 표정을 마구 뭉개었다.

 “혀, 형식아, 서울? 서울 어떠니?”

 민숙의 목청과 함께 느닷없이 대문이 다시 열렸다.

 “지옥이죠.”

 멍청히 선 채로 형식은 한마디로 요약했다.

 “그, 그렇겠지? 으음, 용진아!”

다리 힘이 풀려버린 민숙은 맥없이 무너지듯 그 자리에 스르르 주저앉았다. 약을  보고 반색할 남편의 모습이 눈앞을 스쳤지만 두 다리의 힘은 쉽게 살아나지 않았다.

 “누나 왜 그래요?”

 형식은 당황히 민숙이 옆에 붙어 앉았다.

“용진아, 미안하다. 엄마가 미안해. 용진아, 엄마가 잘못했어.”

 민숙은 넋이 나가버린 얼굴로 주문을 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