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색의 비밀

서외남 (사천대방초등학교 교사)

2012-10-23     경남일보
열어 놓은 창문 사이로 청잣빛 하늘이 다가온다. 새색시 볼처럼 발그레진 나뭇잎이 유난히 예뻐 보이고, 운동장에 뛰노는 아이들 목소리가 정겹게 들린다. 온 세상이 꽃을 피우고 열매 맺느라 바쁜 가을날, 우리 아이들에게 특별한 선물을 주고 싶다.

철 따라 옷을 갈아 입는 나무들을 보고 그냥 스쳐 지나치지 않고 나뭇잎 색깔이 왜 바뀌며, 외떡잎식물과 쌍떡잎식물은 왜 잎 개수가 다른지, 꽃물과 잎 즙물의 성질이 리트머스와 같다는데, 그 속에 어떤 물질이 들었기에 이런 요술을 부리는 것인지 생명의 다양성을 알아보고자 하는 호기심을 불어넣어 주어야겠다.

제 식구 살리기 위해 양분을 만드느라 지친 엽록소가 힘을 못 쓰게 되면 초록빛 색소에 가려 발현하지 못하던 카로틴과 크산토필이 제 모습을 드러내어 노란 잎으로 물들이고 새로 만들어진 화청소(花 靑 素·anthocyan)는 잎마다 붉은 옷을 입힌다. 울긋불긋 물들어가는 단풍을 보노라면 단풍잎에 숨은 색소들과 함께 직장과 대학을 찾아 대도시로 떠난 제자들이 생각난다. 엽록소처럼 자식들을 위해 온 힘과 정성을 쏟느라 시들어가는 부모 그늘을 벗어나 당당하게 홀로서기를 하는 모습이 대견스럽다.

얼마 전 봉곡초등학교에서 6학년을 담임했던 제자에게서 서울 명문대학교에 진학하고 싶다며 추천서를 써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녀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방송인을 꿈꾸며 실력을 쌓아왔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운 까닭에 서울진학의 꿈을 접고 진주에서 대학을 다녔다. 졸업한 후 서울의 병원에 간호사로 취직하자 대학등록금을 마련해놓고 염원해오던 대학에 입학원서를 내면서 오랜 세월 지켜봐 준 필자에게 추천서를 써 달라고 연락한 것이었다.

진주보건대학에 장학생으로 입학하고 처음으로 중간고사를 치던 날, 적성에 맞지 않아서 다닐 수 없다며 시험도 안 보고 필자를 찾아와서 도와 달라고 했었다. 그날 이후 방황이 계속되었고 그때마다 머리를 맞대며 고민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무리 좋은 직장도 적성에 맞지 않고 일하는 것에 보람을 느끼지 못하면 행복할 수가 없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을 얻고도 거기서 만족하지 않고 더 큰 꿈을 이루기 위해 더 높이, 더 멀리 날아오르려고 날갯짓하는 그녀가 참으로 자랑스럽고 고맙다.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제게 선생님은 스승 그 이상이고, 부모님과 같은 존재였다는 걸 다시 느꼈어요. 예전에 주고받았던 메일들을 다시 읽어보니 선생님과 함께한 추억이 너무나 아름다운 거 있죠. 선생님과의 인연이 정말 보통이 아닌 거 같아요.”

가을이 깊어갈수록 제 빛깔을 드러내는 화청소처럼 세상 모든 아이가 숨은 재능을 마음껏 발휘하여 시간의 도화지에 형형색색의 그림을 그려내는 아름다운 날들을 꿈꿔 본다. 마음이 없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올 가을에는 눈을 더 크게 뜨고 귀를 활짝 열어 자연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겠다. 그리고 꽃 한 송이, 풀 한 포기에도 흐드러지게 숨어 있는 생명의 비밀과 안토시아닌이 부리는 꽃 색깔의 마술을 아이들 스스로 발견하도록 도와 주어야겠다. 꽃 하나에도 잎이 셋, 넷, 다섯, 여섯, 여덟 이렇게 다른데 아이들은 특기와 개성이 얼마나 다양한가. 더 가까이 다가가 함께 놀아주고 생각도 함께 나눈다면 아이들의 빛깔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말 못할 고민에 힘겨운 아이는 없는지 세심하게 살피며 내면 깊이 숨어 있는 능력을 뿜어내고 위기가 닥쳐와도 슬기롭게 헤쳐나갈 수 있게 더욱더 사랑하며 아이들을 섬기고 싶다.

/서외남·사천 대방초등학교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