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선현의 향기

조광일 (합포구청장)

2012-11-14     경남일보
국가나 사회의 건강성을 담보하고 지속 가능한 발전을 보장하는 것은 ‘물질’보다 ‘정신’이 우선이라는 말이 있다. 언행일치나 지행일치는 옛말이 되었고, 그로 인해 사람들 사이에 믿음이 사라지고 사회는 이기심으로 가득 채워지고 있는 요즘, 학봉 김성일 선생과 그 후손의 이야기는 진정한 우국충정이 어떤 것인지, 선비의 도리가 무엇인지를 일깨워 준다.

오늘날까지 학봉 선생의 집안이 많은 이들로부터 추앙받고 있는 것은 학봉의 고매한 인품과 덕망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의 우국충정과 그러한 정신을 이어받은 후손들의 삶의 모습 때문이다.

학봉 김성일은 서애 유성룡과 함께 퇴계의 양대 제자로 자신의 신념을 위해 목숨을 건 인물이었다. 임금 앞에서도 할 말은 하고야 마는 강직함과 임란 전 일본에 통신사로 갔을 때 일본인들에게 보여준 조선 선비로서의 자존심과 격조 있는 자세는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으로 전해지고 있다. 학봉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도 병마절도사와 경상도 초유사, 경상도 관찰사를 차례로 지내면서 관군을 지휘했고, 진주성에서 왜군을 맞아 장렬히 싸우다 56세의 일기로 순국했다.

학봉의 후손 역시 충신 열사이기는 마찬가지였다. 학봉 선생의 장손인 단곡 김시추 선생은 1621년(광해군 13) 영남 유림의 소수로 추대되어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는데 공헌했고 정묘호란 때에는 안동 의병대장으로, 병자호란 때에는 안동 유진장으로 활약했다. 또 11대 종손인 서산 김흥락 선생은 일제가 국모를 시해하고 왕권이 흔들리자 전국 최초의 항일의병인 ‘안동 갑오의병’을 일으켰으며 석주 이상룡, 일송 김동삼, 기암 이중업, 공산 송준필, 성제 권상익과 같은 수많은 걸출한 독립운동가를 배출하였다.

그런데 이처럼 명망 높은 집안에 노름으로 가산을 탕진한 파락호(破落戶)가 있었다. 바로 학봉의 13대 종손 김용환 지사이다. 파락호란 행세하는 집안의 자손으로 허랑방탕(虛浪放蕩)하여 아주 결딴난 사람을 일컫는다. 그는 대대로 내려오던 전답 18만평을 포함해서 현 시가로 200억원에 가까운 재산을 모두 노름으로 탕진하고 말년에는 궁핍한 생활을 면치 못했다고 한다. 심지어 외동딸이 시집을 갈 때 시댁에서 장롱을 마련하라고 준 돈이 있었는데 이 돈마저도 노름으로 날려 버렸다. 그래서 딸은 하는 수 없이 큰어머니가 쓰던 헌 장롱을 들고 울면서 시집을 갔다는 것이다. 이런 일들로 그는 안동 일대뿐 아니라 근대 조선에서 대표적인 파락호 중 한사람으로 꼽혔던 것이다.

김용환 지사는 광복이 되고 그 이듬해 숨을 거뒀는데, 1955년에야 왜 그처럼 치욕스러운 삶을 살았는지 그 사실이 드러났다. 만주에 독립자금을 댄 독립투사였음이 사후에 밝혀졌던 것이다. 그간 탕진했다고 알려진 돈은 모두 만주 독립군에게 보내졌다. 김 지사는 일제 감시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름꾼으로 철저하게 위장하여 살면서 주색잡기, 파락호라는 불명예를 뒤집어쓰면서도 아무에게 이 사실을 밝히지 않은 채 집안사람들의 원망까지 다 끌어안고 떠났던 것이다. 임종 무렵에 이 사실을 알고 있던 독립군 동지가 머리맡에서 “이제는 만주에 돈 보낸 사실을 이야기해도 되지 않겠나”고 하자 “선비로서 당연히 할일을 했을 뿐인데 이야기 할 필요없다”고 하면서 눈을 감았다고 한다.

‘화향천리행 인덕만년훈(花香千里行 人德萬年熏)’이라 했던가. 죽는 순간까지도 남을 의식하거나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올곧은 선비의 지조로 도의(道義)를 실천한 선생의 참 선비정신과 선현의 향기는 가을국향보다 더 그윽하게 느껴진다.

조광일 합포구청장 새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