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희망을 노래하다

변진희 (진주 문산초등학교 교사)

2012-11-26     경남일보
어릴 적 동네 친구 길선이네 산딸기 밭은 비봉산 너머에 있었다. 산봉우리를 하나 넘고도 한참 밑에 있어서 어린 발걸음으로 한 시간쯤 산을 오르락내리락해야 했다. 내 손이 닿을락 말락 하는 딸기나무에서 어른 손톱 너비의 빨갛고 봉긋한 것만 골라 소쿠리에 담아 놓으면 쪽진머리 위로 산딸기가 한가득 든 바구니를 이고 동네로 내려가시던 길선이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린다. 여전히 고우실까….


돌이켜보면 그 시절의 ‘등산’은 소꿉동무와 함께하는 놀이이자 이제와 떠올리며 흐뭇하게 미소 짓게 하는 내 유년시절의 추억이었다. 이후 학창시절에는 공부 때문에, 서른 즈음에는 아이들을 키운다는 핑계로 산 오를 엄두를 못 내고 있다가 나이가 조금씩 들고 허리춤에 살이 잡힐 무렵인 몇 년 전부터 운동도 하고 지인들과의 친목도 다질 겸 다시 등산인의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다.


일 년에 한두 번쯤, 그야말로 간간이 지인들과 오르던 산을 지난 토요일에는 교육가족과 함께했다. 전날 내린 비 덕분에 평소보다 맑게 갠 하늘 아래 울긋불긋 노랗고 빨갛게 물든 나무들과 그들이 발산하는 피톤치드 향을 그대로 전해주는 상쾌한 바람은 온 몸으로 교육가족을 반겨주는 듯했다.


솔직히 교장선생님의 권유가 아니었으면 그날도 바쁜 학교 일을 핑계로 가지 않았을 텐데. 정상에 오른 나를 반기는 청량한 공기와 시원한 바람, 무엇보다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들의 향기에 흠뻑 빠진 나를 깨닫자 권유해주신 교장선생님이 감사했다. 자꾸 찌는 나잇살과 오랜만의 산행으로 산 오르는 일이 그다지 만만하지 않았음에도 생각보다 몸이 가볍게 느껴졌던 건 구수한 농담으로 숨참을 잊게 해 준 선배님과 함께했기 때문인 것 같다.


같은 산이라도 함께하는 이에 따라 그 산은 우리에게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또 다른 생각들을 갖게 한다는 것을 산과 만날 때마다 느끼게 된다. 엘리베이터는 높은 곳을 오를 때 숨도 차지 않고 힘도 들지 않게 도와주는 편리한 과학의 선물이다. 하지만 그 엘리베이터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무게만큼의 정원만 허락한다. 그에 비해 산은 오를 때 숨도 차고 다리가 아프긴 하지만 한 명이 와도 수천 명이 와도 정원과 무관하게 반가이 맞아주고 모두를 품어줄 만한 넉넉한 공간과 힘을 가지고 있다. 산은 그래서 우리에게 더 큰 의미를 주지 않았던가?

두 다리로 오르건 지팡이에 의지해서 오르건 정상까지 올랐다 내려온다면 다음에는 더 큰, 더 힘들고 어려운 일도 헤쳐 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과 희망을 얻는 곳이 바로 산이다. 그래서 나는 또 다른 희망을 얻으려 돌아오는 토요일에는 좀 더 먼 산을 오르려 한다.

/진주 문산초등학교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