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고 싶은 오늘을 위하여

신소진 (경상대신문사 편집국장)

2012-12-13     경남일보
현관을 나서면 겨울 냄새가 나는 게 벌써 12월이다. 새 학기라고 마음을 다잡았던 것이 불과 두 달 전인데…. ‘10대의 세월은 시속 10km, 20대의 세월은 20km, 30대의 세월은 30km로 흐른다’는 명언인지 우스갯소리인지 모를 말이 문득 떠오르는 요즘이다. 이 말에 따르면 내가 느껴야 할 속도인 20km는 자전거의 평균속도쯤 되는데 실제로 느끼는 세월의 속도는 그의 세 곱절은 되는 것 같다.

친구들과 이야기하다가도 오늘이 며칠인지, 무슨 요일인지를 깨닫고는 너나 할 것 없이 ‘벌써?’ 하고 호들갑을 떨고 놀란 눈을 하고서는 ‘요새 왜 이렇게 시간이 빨리 가지’라든지 ‘뭐했다고 벌써 12월이야’ 등 답도, 대상도 없는 짜증 섞인 질문을 던지는 일이 예삿일이다. 그 끝에는 흘러가 버린 지난날이 아쉬워 절로 나오는 한숨도 빠지지 않는다.

시간은 분명 같은 속도로 흐르고 있을 텐데, 왜 이렇게 빨리 지나가는 것처럼 느껴지는지. 2학년 2학기 무렵부터 이 고민을 계속해온 나는 여러 가지 문제연구소장이자 명지대 교수인 김정운의 책 ‘남자의 물건’에서 그 이유를 찾아냈다. 책은 ‘왜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빨리 흐르는가’라는 물음에 ‘기억할 게 전혀 없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한다. 시간이 빨리 흐르는 건 기억할 것이 없어서인데, 기억할 것이 없으면 그 시기가 짧게 느껴진단다. 그리고 기억할 게 없다는 이야기는 자기 삶에 의미가 부여되지 않는다는 뜻이란다. 기억할 것이 없다, 삶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 참 끔찍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끔찍한 말이 조금은 이해가 된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의미 있는 일, 새로운 일만을 기억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도 억지로가 아니라 저절로 기억에 스며든다. 내 삶을 이루고 있는 뜻깊은 경험, 돌아가고 싶은 추억으로서의 기억으로 말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에게 기억되는 현재는 어떤 모습인가. 우리는 과연 ‘기억하고 싶은 일’로 흐르는 시간을 채워나가고 있을까? 똑같은 하루하루를 보내고 흐르는 시간만을 탓하며 전전긍긍하고 있지는 않은지.

시간을 내 마음대로 쓰지 못하게 된 때부터 우리의 시간은 점점 빠르게 흐르기 시작했다. 시간표에 맞춰 내 시간을 만들고, 해야 하는 일이 많아져 늘 시간에 쫓길 때부터 말이다. 흐르는 시간을 마음대로 채워 나가던 어린 시절은, 기억 속의 어린 날은 그래서 그렇게 긴 것일까. 그때처럼 하고 싶은 걸 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기억을 곱씹었을 때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 만한 시간을 보낸다면 시간이 다시 제 속도를 내 주려나. 우리는 하고 싶은 걸 너무 못하고 산다. 학점을 채워야 해서, 실적을 쌓아야 해서, 해외연수 경험을 하고 어학점수를 높여야 해서 등등, 이력서를 채우기 위한 몸부림으로 온 시간을 쓰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시간은 해야 할 수많은 일과 생각들로 지친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데 말이다.

기억하고 싶은, 돌아오고 싶은 시간으로 현재를 채워나가 보자. 1분 1초까지 생생하게 느끼며 훗날 오늘을 떠올릴 때 미소를 띠고 오래도록 곱씹어도 좋을 만한 일과 생각들로 말이다.

/신소진·경상대신문사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