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일보의 천기 엿보기] 단종대왕 태실지(下)

세종대왕 태실이 단종 태봉을 감싸고 도는 지세

2013-06-26     정영효/이웅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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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 태실지에서 바라본 단종대왕 태실. 단종대왕 태실은 태봉이라기 보다는 작은 동산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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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의 첫 손자로서 가장 사랑을 많이 받았던 단종대왕. 단종대왕에 대한 세종대왕의 특별한 사랑은 역사적 기록으로 확인되고 있다. 단종대왕이 1441년(세종 23년) 태어나자 마자 원손(元孫)에 봉했으며, 1448년(세종 30)에는 왕세손(王世孫)으로 책봉했다. 이는 세종대왕이 손자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지극했는지는 알려주고 있다. 600여년 전 세종대왕과 단종대왕이 생전에 함께 했던 9년간(1441~1450년)의 애틋한 애정은 사후에도 지금까지 경남 사천시 곤명면 은사리에서 이어지고 있다. 세종대왕의 단종대왕에 대한 각별한 애정은 60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천에서 이어지고 있다. 세종대왕 태실지(사천시 곤명면 은사리 산27번지)와 단종대왕 태실지(사천시 곤명면 은사리 산438)는 채 300여m도 떨어지지 않은 지척에 있다. 조손간의 인연은 사후에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생전에 애손(愛孫)인 단종대왕을 항상 옆에 두고 보살펴 주고 싶었던 세종대왕은 사후에도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곳에 손자(단종대왕)의 태실을 두고 보살피고 있다. 이는 손자에 대한 지극한 사랑의 발로였을 것으로 보인다.

세종대왕은 아마 단종대왕이 자신의 사후에 비극을 당할 것을 예언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또 세종대왕은 손자인 단종대왕의 태실(胎室)이 자신의 태실에서 채 300여m도 떨어지지 않은 지척에 만들어 질 것도 알고 있은는지도 모른다. 세종대왕은 비록 지존의 자리에 있었지만 역사를 거스르지는 못했다. 하지만 비극적 운명을 맞을 손자를 사후에도 옆에 두고 계속 보살피고자 하는 할아버지의 애틋한 사랑은 세월을 초월해 사천에서 계속되고 있다.

11세의 어린 나이로 등극한 단종대왕은 14세때인 숙부인 수양대군(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겼다.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어 강원도 영월(寧越)로 유배되었다가 16세의 젊은 나이에 억울하게 죽음을 맞이한 권력의 희생물이 된 비운의 임금이다.
 
단종대왕태실지안내판
단종대왕 태실지 안내판


◇소재지 논란

사천시 곤명면 은사리 산438에 소재하고 있는 단종대왕 태실지에 대해 경북 성주군에서는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이같은 논란은 임진왜란으로 인해 ‘태봉등록’이 소실되면서 비롯됐다. 그렇지만 단종대왕의 태실의궤 기록과 태실의 석물이 사천 곤명에 남아 있는 점을 미루어 보면 ‘사천이 단종대왕 태실지’라는 사실이 더 설득력을 갖고 있다.

성주군에서는 단종대왕 태실지가 조선왕조실록의 문종실록편과 세조실록편,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에서 발간한 ‘조선의 태실 Ⅰ’에서 나오는 기록을 들어 단종대왕 태실이 성주군 가천면 법전동 산10에 소재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2012년 12월 7일자 영남일보에 따르면 영조는 소실된 태실 자료를 보완하고 이를 토대로 전국의 태실을 일괄적으로 정비하기 위해 전국 각 지방의 감사와 수령에게 관할구역의 태실을 조사하게 했다. 이 때 사천지역에는 ‘세종이 원손인 단종을 너무 아끼고 사랑해서 자신의 태실 가까이에 단종의 태실을 조성했다’는 이야기가 떠돌고 있었다. 이에 사천지역에서는 단종 태실이 지금의 곤명면에 있다고 보고하고, 조정에서는 사천지역에서 보고한 내용을 사실로 믿고 태실 정비에 나선다. 이때부터 단종 태실은 경남 사천에 있는 것으로 기록됐다는 것. 즉 구전이 와전됐다는 것이 성주지역의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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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대왕 태실지를 감싸 안으면서 흐르는 수로
 

이에 대해 사천시는 ‘태봉등록’ 2권과 조선왕조실록, ‘세종대왕 단종대왕 태실수개의궤(영조 6년·1730년)’, ‘세종대왕 단종대왕 태실 표석 수립시 의궤(영조 10년·1734년)’ 등의 기록을 들어 단종대왕 태실이 사천시 곤명면에 위치하고 있다는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고 있다. 사천문화원에서 발간한 ‘세종대왕 단종대왕 태실의궤’의 기록에 따르면 조선왕조실록과 태봉등록에 단종대왕의 태봉(태실)은 경북 성주에 안치됐으며, 이후 법림산으로 옮겨져다가 세조때 철거됐다는 기록이 있다. 철거 이후에는 단종대왕 태실과 관련된 기록은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다. 200여년이 지난 인조때 이후부터 조심스럽게 언급된다. 이는 세조때부터 인조 이전까지 단종에 대한 사안을 다루기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특히 세조때 경북 성주 법림산에서 철거된 단종대왕 태실 이전지에 관한서도 언급 자체가 절대 금기시됐을 것으로 추측된다.

‘세종대왕 단종대왕 태실 수개 의궤’에 따르면 당시 경상도 관찰사와 곤양 군수는 ‘소곡면 조동산의 한 지역에 세종대왕과 단종대왕 태실이 봉안되어 있고, 태실이 손상돼 있다’고 장계를 올렸다. 이에 따라 영조는 대대적으로 보수할 것을 명했으며, 단종대왕 태실을 보수한 제반 사항이 ‘세종대왕 단종대왕 태실 수개 의궤’에 자세하게 기록돼 있다. 또 4년 뒤에는 단종대왕 태실에 표석을 건립했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세종대왕 단종대왕 태실 표석 수립시 의궤’에도 ‘세종·단종 양(兩) 조(朝)의 태봉이 곤양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경상감사는 양 태봉에 표석이 없는데 표석을 세울 것을 주청했고, 단종대왕 표석을 세우는 길일(吉日)을 그해(1734년) 9월 8일 진시) 택했다’는 사실이 ‘세종대왕 단종대왕 태실 표석 수립시 의궤’에 기록돼 있다. 그리고 표석을 세우는 일정이 날짜별로 자세하게 기록돼 있다. ‘태봉등록’ 2권을 보면 역대왕의 태실지 기록이 있는데 문종대왕과 세조대왕의 경계선에 조그만 글씨로 ‘단종대왕 태봉 곤양((端宗大王 胎峰 昆陽)’이라고 써 놓고 있다. 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편(영조 10년 7월 11일 甲申)을 보면 ‘세종대왕·단종대왕의 태봉은 경상도 곤양군에, 예종대왕의 태봉은 전라도 전주부에, 현종대왕 태봉은 충청도 대흥군에 있다’고 기록돼 있다. 또 사천문화원에서 발간한 ‘세종대왕 단종대왕 태실의궤’에는 일제가 전국에 소재하고 있는 왕의 태를 서삼릉으로 강제적으로 옮길 때 당시 사천 곤명에서 단종대왕 태실에서 태항아리를 꺼냈다는 사실을 목격한 사람들이 직접 증언을 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단종대왕 태실에 있는 깨어진 태비신 뒷면에는 희미하나마 ‘大王’이라는 글자가 각인돼 있어 이곳이 단종대왕 태실지임을 알려주고 있다.

지방 수령들의 보고들과 왕조실록·태봉등록의 기록, 사천시 곤명면 은사리 현 단종대왕 태실지 석물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한 결과 단종대왕 태실은 사천 곤양(현 곤명)에 위치하고 있음이 입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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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대왕 태실지임을 알려주고 있는 태비신, 귀부와 이수 등 조형물.
 

◇태실 형국

단종대왕 태실은 세종대왕 태실 인근의 남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단종대왕 태를 묻은 태봉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작아 보였다. ‘임진왜란 때 왜적이 몰려와 규모가 큰 세종대왕의 태실은 거의 파괴되었으나, 규모가 작은 단종 태실은 적의 눈길을 끌지 못하여 다행히도 화를 면했다’는 기록이 이해될 수 있는 대목이다. 단종대왕 태봉은 산으로 둘러쌓인 들판 끝자락에 독립적으로 솟아 있는 자그마한 동산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했다. ‘단종대왕 태실지’라는 안내판이 없었다면 이곳이 역사가 서려 있는 곳이라는 것을 알기 어려웠다. 현재는 산줄기가 단절되어 있지만 일제가 맥을 차단하기 이전에는 산줄기가 연결되어 있었다고 전해져 내려고 있으나 확인할 길은 없다.

단종대왕 태실로 가는 오솔길은 아늑하고 포근했다. 태실에서 2시 방향으로 세종대왕 태봉이 한눈에 들어왔다. 손자(단종)와 할아버지(세종)간에 눈에 보이지 않는 기운이 이어져 있는 것 같았다. 세종대왕 태실에서 단종대왕 태실을 보면 단종대왕 태봉 전체가 보이듯이 단종대왕 태실에서 세종대왕 태실을 보면 세종대왕 태봉 전체가 눈앞에 펼쳐진다. 들판을 앞에 두고 떨어져 있는데도 지맥은 이어져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아마 세종대왕과 단종대왕, 즉 조손간 애틋한 애정이 600년 가까이 끊어지지 않고 지속됐기 때문이라고 생각이다.

지세의 형국과 마찬가지로 수세도 세종대왕와 단종대왕이 연결돼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단종대왕 태실을 휘감아 도는 수로는 굽이굽이 흘려 세종대왕 태실을 감싸고 흐르는 수로와 합쳐진다. 합수된 물은 완사천으로 흘려나간다. 합수부는 마치 세종대왕이 손자인 단종대왕을 만나듯 양 태실에서 흘려내리는 물은 자연스럽게 합쳐진다. 세종대왕과 단종대왕간 애정의 끈은 지맥과 수로에 의해 영원히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