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민 연재소설] 진주성 비차 (229회)

16장 1. 추락 후에 오는 것

2014-10-17     경남일보
미시(未時, 오후 1시∼3시) 무렵이었다. 진주복병장 정유경이 300명이 넘는 군사를 이끌고 나타났다.

정유경 부대는 진현으로부터 사천에 이르러 늠름하게 열병(閱兵)하고 군대 위력을 한껏 뽐냈다. 수성군은 힘을 얻었다. 병력의 많고 적음에는 상관없이 아군이 가까이 있다는 것은 퍽 고무적인 일이었다. 우선 심리전에서 그만큼 앞서는 것이다.

“왜놈들아! 너희는 독 안에 든 쥐새끼들이다.”

“포위된 것은 우리가 아니라 네놈들이란 것을 아느냐?”

정유경은 무예가 특출한 용사 20여 명을 차출했다. 그는 칼 든 팔을 높이 치켜들고 흔들며 적개심에 불타는 소리로 명했다.

“지금 남강 밖에서 분탕질하는 왜적들이 있다는 정보가 막 들어왔다.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용장(勇將) 밑에 약졸(弱卒) 없다 했다. 우렁찬 목소리가 대기를 울렸다.

“당장 남강 물고기밥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남강 물도 덩달아 한층 세차게 흐를 기세들이었다.

“괘씸한 그놈들을 절대 살려둘 수가 없다. 당장 출전하라!”

조선 용사들이 급습하자 전혀 예상도 하지 못한 왜군은 혼비백산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죽거나 달아났다.

“피라미 같은 놈들! 자아, 이제 저쪽으로 가보자.”

“민간인들을 괴롭히는 것들이 어디 군인이라고……?”

적을 섬멸한 용사들은 그 기세를 몰아 남강변 대밭으로 들어갔다. 거기는 지난날 조운과 상돌이 처음 만났던 곳이었다. 그때나 이제나 대나무는 변함이 없었다. 비차의 재료를 많이도 제공한 고마운 대밭이었다. 강바람을 받은 대숲에선 ‘스르릉 스르릉’ 소리가 났다.

“어이쿠우! 조, 조선군이……?”

“어? 조선군이 언제 성 밖으로 나왔지?”

그곳에는 편죽(대나무 발)의 재료로 쓸 대나무를 찍는 왜군들이 있었다. 굵고 시퍼런 대나무들이 아깝게 쓰러지는 중이었다.

“이놈들아! 왜 남의 나라 것을 너희 마음대로 건드리느냐?”

“용서할 수 없다. 왜놈들아, 칼을 받아라!”

용사들은 보이는 대로 왜군들을 쳐 죽였다. 워낙 무술 솜씨가 출중한 용사들인지라 왜군은 자기들이 베어 넘어뜨린 대나무 위로 속속 쓰러져갔다. 왜군이 쏟은 피가 푸른 대밭을 붉게 물들였다.

그런데 조선군도 일본군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 대밭 속에서도 가장 대나무가 빽빽하게 우거져서 귀신도 눈치 채지 못할 으슥한 곳에 숨어 있던 사람 그림자 하나를.

숨을 죽인 채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사람, 놀랍게도 광녀 도원 처녀였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누구든지 먼저 본 자가 나중에 본 자의 목숨을 가져가는 그 전쟁터에서 나약한 여자, 그것도 정신이 온전치 못한 여자가, 손에 무기 하나 들지 않은 채로 죽지 않고 돌아다니고 있었다니!

세상이 전쟁이라는 미치광이 놀이에 빠져 있어, 미치지 않은 자는 죽어가고 미친 자는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