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덕산마을

이창섭 (중소기업진흥공단 홍보실장)

2015-03-11     경남일보

초등학교 다닐 때 아버지 직업을 묻는 선생님 질문에 “예! 대나무 파십니다”가 늘 하던 대답이었습니다. 선친은 젊은 30대 후반부터 시작해 5년 전 85세로 돌아가시기 전까지 45년 이상을 대구에서 대나무업을 운영하셨습니다. 그래서 대밭으로 유명한 산청군 덕산마을에 대나무를 구하러 자주 가셨습니다. 제가 몸담고 있는 중소기업진흥공단이 진주에 내려온 터라 아버지의 작은 흔적이라도 찾아볼 겸 덕산에 가 보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장정 여럿이서도 버거웠던 대나무 다발을 육로로 운반하기 힘들어 그 대안으로 산지 아래 덕천강 강물에 띄워 흘려보내고, 강 하류쪽에서 대나무 다발을 건져 올려 큰 짐차로 대구까지 어렵게 운송했지요. 그때를 기억하는지 덕천강은 소리없이 유유히 흐르고 있더군요.

돌아보니 시천면에 1982년에 생겨난 중국음식점이 있길래 혹 아버지를 기억하지 않을까 싶어 들어가 보았습니다. 젊은 사장에게 몇 마디 물어보니 아버지를 기억하지는 못하더군요. 국수나 자장면을 좋아하시던 아버지 식성상 반드시 들렀을 법한 그 식당에서 예전에 아버지가 드셨을 자장면을 먹어 보았습니다. 눈가에 자꾸만 이슬이 고이더군요.

아버지가 대나무 대금을 송금할 때 이용했던 시천면 우체국 사무소도 가보고, 한나절에 걸쳐 아버지의 흔적이 있을 곳이면 모두 둘러보았습니다. 어릴 땐 철이 없어 아버지께서 시키시는 그 송금 일을 귀찮게 생각했었는데 얘기로만 들었던 우체국 사무소 앞에 와 보니 얼마나 후회가 되는지 모르겠더군요.

덕산마을에서 오랫동안 대나무 일을 해오신 모 언론인의 백부님도 만났습니다. 저희 아버지의 얼굴은 모르지만 함자는 정확히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여든을 넘긴 그분께서는 “생전에 자네 부친과 같이 이곳 덕산에 한 번 와봤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시며 아버지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걸 꽤 미안해 하셨습니다.

지금은 사양산업이지만 아버지가 종사한 대나무업으로 저희 6남매는 공부도 하고 결혼까지 하면서 지금껏 잘살고 있습니다. 고마운 대나무이고 덕산마을이고 아버지이십니다. 나중에 제 아들과 함께 덕산마을을 다시 찾아보고, 또 복성각에서 자장면도 먹으면서 할아버지를 가슴속에 꼭 같이 기억했으면 합니다.

이창섭 (중소기업진흥공단 홍보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