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문화재 여행] 거창 정온고택

조선 중기 충신 '정온' 고택…학술적 가치 지닌 문화재

2015-03-24     이용구
 


덕유산 남쪽 끝의 금원산에서 흘러내린 산상천을 따라 위천에 이르면 본관 초계(草溪), 동계 정온 선생의 고택이 나온다. 정온 선생은 광해군에게 나이 어린 영창대군을 방에 장작불을 지펴 열기로 죽이는 방법을 동원한 것은 부당하다는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도 10년간 유배 생활을 했다.

정온 선생은 함양 일두 정여창 선생을 모신 청계서원 바로 옆 남계서원에 제향되었다. 유명한 서원 두 군데가 이렇게 가까이 있는 경우도 드문 경우로 혹시라도 이곳을 방문하게 되면 꼭 들러봐야 할 곳이다. 특히 정온고택은 1820년에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이곳에 들어서면 포근함, 따뜻함, 평온함을 느낄 수 있다. 옛날의 숨결이 오롯이 담겨져 있어 또 다른 힐링을 맛볼 수 있다.



◇정온(鄭蘊)선생은=거창군 위천면에서 태어난 동계 정온(鄭蘊1569~1641)선생은 조선중기 문신이며 충신으로 소문났다. 1610년(광해군 2년) 진사로서 문과에 급제하여 설서(說書)·사서·정언 등을 역임하고, 1614년 부사직(副司直)으로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처형이 부당함을 상소하자 광해군에게 미움을 사 제주도에서 10년간 유배생활을 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석방, 헌납에 등용되었다. 이어 사간·이조참의·대사간·경상도관찰사·부제학 등을 역임하고,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을 격을 당시 이조참판으로서 김상헌(金尙憲)과 함께 척화(斥和)를 주장하다가 화의가 이루어지자 자결을 시도한 충신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자 덕유산에 들어가 은거하다가 사망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제주시 오현단에 있는 동계 정온 선생의 시비 ‘야음(夜吟)’은 “등불을 돋우며 짧은 칼을 보다가 하늘과 땅 사이 남쪽 바다는 멀고 별자리 북극성도 아득하구나. 작은 내 마음이 득이나 벼슬에는 욕심이 없고 어부나 나무꾼 같은 작은 소원뿐이라네. 문설주에 기대어 미친듯이 노래 불렀더니 사람들은 저 선비 교만하다 말하는구나”라며 아직도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다른 사람들의 말을 빌려 호되게 꾸짖는다.



 


◇거창의 보물 정온고택=정온고택은 500년 전통이 그대로 살아 숨 쉬는 소중한 거창의 보물이다. 국가중요민속문화재 제205호인 정온고택은 한옥의 모든 특징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 2684㎡(811평)정도의 생가 구성은 대문채, 사랑채, 중문채, 안채, 아래채, 곳간채 그리고 새로 건립하고 있는 광채 등 7개동으로 구성돼 있고 1820년에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온고택에 들어서면 포근함, 따뜻함, 평온함을 느낄 수 있는 조용한 한옥이 주는 모든 장점들을 오감으로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집 주위의 나뭇결 하나하나에서도 옛날의 숨결이 오롯이 담고 있는 고택이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앞으로 정원이 있고, 그 뒤편에 사랑채가 자리하고 있다. ㄱ 자형인 사랑채는 7칸인 사랑채는 바라보면서 좌측으로 방을 두고, 연이어 두 칸 대청을 두고 있다. 그리고 방과 누정을 두었다. 누정의 경우에는 기단을 쌓지 않고 그대로 기둥을 놓아 올린점이 특이하다.

난간을 두른 누정의 지붕은 길게 내달아 겹처마로 꾸며졌으며, 바깥으로 기둥을 받치고 있다. 좌측의 방 앞에 툇마루에도 난간을 두른 것이 사랑채의 멋이다. 전체적으로 짜임새가 특이하며 남부지방 특유의 사랑채 구성을 하고 있다. 사랑채에서 조금 비켜선 뒤편으로는 중문채가 자리를 하고 있어, 사랑과 안채의 연결구실을 하고 있다.

중문을 들어서면 네모 반듯한 내정(內庭)인데 사랑채와 안채 사이의 내정 좌우로 각각 부속건물이 있다. 왼쪽에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큼직한 곡간(穀間)이 있다. 중방(中枋) 아래에 판벽(板壁)을 들인 이 곡간 뒤편에 내측(內厠)이 있다.

마당 오른쪽에는 서향한 뜰아래채가 있는데 마루와 방으로 구성된 외줄박이 4칸집이다. 내정을 앞에 두고 안채가 남향하였는데 정면 8칸, 측면 3칸 반의 전·후퇴가 있는 두줄박이 겹집이다. 왼쪽 끝에 정면 2칸, 측면 1칸 반의 부엌을 두고, 이어 정면 2칸, 측면 2칸 도합 4칸 규모의 안방을 두었다.

사랑채의 상량대에는 중창연대를 알 수 있는 묵서명(墨書銘)이 있는데 ‘崇禎紀元後四庚辰三月(숭정기원후 4 경진 3월)’이라고 기록돼 있다. 이는 순조 20년(1820)에 해당된다.

안채·사랑채의 평면구성은 겹집으로, 거창이 남쪽 지방인데도 북방성향의 겹집이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러나 기단이 낮은 반면 툇마루가 높게 설치되어 있는 고상성(高床性)도 짙어 남쪽지방의 특색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다.

이와 같이 북방성향의 겹집에 남방성향의 고상식이 공존한다는 점에서 이 집의 학술적 가치를 찾을 수 있으며, 조선 후기 사대부주택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