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강홍의 경일시단] 빠져나간 자리

2015-04-19     경남일보
빠져나간 자리 (정다혜 시인)



설거지하다 그릇 속으로 그릇이 끼었다

세제를 넣고 부드럽게 달래 봐도

서로가 서로를 놓지 않는다

움직일 틈새도 없이 저리 오래 껴안고 있다니

나는 저 팽팽함이 두려워진다

꼭 낀 사기그릇 한참 만지작거리며 길을 찾다

하나를 살리기 위해 하나를 버린다

이것들 제 몸 부서질 줄 알고도

꼭꼭 끼어 있었단 말인가,

깨어져 한 그릇이 한 그릇에서 빠져나간 그 자리

그릇의 피가 흥건해진다

내가 살기 위해 너를 부셔내야 했던

어미의 옹이진 자궁이 그날처럼 핏빛이다

내게서 빠져나간 것이 나를 할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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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의 셈법은 언제나 어렵다, 팽팽한 긴장 끝에 이격의 결정은 상처와 통증을 수반한다.

끼어있든 그릇이든 어미의 자궁에서 분리되는 생명이던 또는 내 언저리에 기생하든 모든 것들은 밀착계수가 높을수록 더 아프다. 내게서 빠져나간 자리들이 모서리로 날카롭다. 시방 온 세상도 그렇다. (주강홍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