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344)

<105>경남지역의 문인 등단50주년 기록자들(13)

2015-05-31     경남일보
김춘수는 1948년에 첫시집 ‘구름과 장미’를 발간함으로써 공식 등단의 길을 밟은 셈이었다. 그는 1945년 유치환 윤이상 김상옥 등과 통영문화협회 멤버로 활약했고 이어 이듬해 마산에서 나온 조향, 김수돈 등과 함께 <로만파>동인회에 가담했다. 그리고 대구에서 발행되던 ‘죽순’에 시 <온실>을 발표했는데 모두 이른바 워밍업이었다.

그는 첫시집에 이어 마산중학교로 옮겨 재직하면서 제2시집 ‘늪’을 출간했다. 1951년 7월 25일 문예사 발행이었다. ‘문예사’는 월간 ‘문예’를 내는 출판사였으므로 김춘수로써는 스스로를 알리는 곳으로 적합하다고 여겼으리라. 이 두 번째 시집 머리에 서정주의 <서(序)에 대하여>가 붙여져 있다.

“김춘수형의 이 책은 전저 ‘구름과 장미’에 비하여 월등한 진경이나 비약을 보이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치밀이라면 훨씬 더 치밀해졌고 심화라면 또한 상당한 심화를 보이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하여간 그의 잔잔하면서도 독특한 감성의 여러 체험들은 이 책에 와서도 한결같이 꾸준하여 우리들의 기꺼운 기대를 걸기에 족한 바가 있다. 한 개의 김춘수적 사상의 높이와 김춘수적 시적 종교의 넓이에까지, 이들의 체험이 마침내 도달될 날이 있기를 바라마지 않을 따름이다.”

서정주는 이 서문이 김춘수를 확실한 시인으로 담보해준 것으로 스스로 알고 있었던 듯하다. 최근 서정주 탄신 100주년 기념시 낭송회를 월간 미네르바 문학회가 서울 예술인마을 ‘서정주의 집’에서 개최했는데 그때 참석한 부산의 양왕용 시인(부산대 명예교수, 현 한국문협 부이사장)은 다음과 같이 서정주의 말을 회고했다. “부산에서 있었던 행사에 미당 서정주 시인이 참석했었어요. 행사를 마친 자리에서 제가 ‘저는 경북대에서 김춘수 선생님께 배워 시를 쓰게 되었습니다.’하고 인사를 올리자 ‘아, 양교수는 내 제자의 제자니까 손자 제자로구먼.’하시는 것이었어요.”

이때의 미당의 말은 김춘수가 자기에게 제자 내지 제자뻘이라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었던 뜻으로 해석이 된다. 김춘수가 마산중학교에서 가르친 학생 중에 천상병이 있었다. 천상병을 문단에 진출시키는 데 앞장 섰던 사람이 김춘수였다. 그런데 천상병은 1993년 4월 28일 먼저 죽고 김춘수는 이보다 11년 뒤 2004년 11월 29일에 돌아갔다. 김춘수는 천시인이 죽자 <네가 가던 그날은>이라는 시를 썼다.

“네가 가던 그날은/ 나의 가슴이/ 가녀린 풀잎처럼 설레이었다// 하늘은 그린 듯이 더욱 푸르고/ 네가 가던 그날은/ 가을이 가지 끝에 울고 있었다// 구름이 졸고 있는/ 산 마루에/ 단풍잎 발갛게 타며 있었다// 네가 가던 그날은/ 나의 가슴이/ 부질없는 눈물에/ 젖어 있었다”

천상병은 마산중학 5학년때 그의 스승 김춘수로부터 김춘수 첫시집 ‘구름과 장미’를 받았었다. 거기에 다음과 같이 싸인해 주었다. “모든 것이 그러하듯 네가 그것에 닿아야만 네 것이 될 수 있다. 김춘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