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용의 매국

임영주(마산문화원장)

2015-06-16     경남일보
대마도 이즈하라에는 이완용이 친필로 쓴 일본인 ‘코쿠분쇼타로(國分象太郞)’의 묘비가 있다. 많은 여행객이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이곳을 방문하여 이완용의 매국사실에 울분을 토하고 있다. 묘비명은 ‘종삼위훈1등국분상태랑지묘(從三位勳一等國分象太郞之墓)’이고, ‘후작 이완용 서(侯爵 李完用 書)’라고 쓰여 있다.

‘코쿠분쇼타로’는 대마도 출신으로 ‘이토히로부미’의 통역사이며 ‘을사늑약문’과 ‘한ㆍ일병합문’ 초안을 작성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는 이러한 공적으로 총독부 인사국장 겸 중추원 서기관장으로 승진하였으며 이어서 이왕직차관으로 조선탄압의 앞잡이가 된 인물이다. 후작 이완용이 ‘코쿠분쇼타로’ 공적비의 묘비명을 쓴 것이다.

이완용은 1858년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나 25세에 과거에 급제한 후 일찍 영어를 배워 미국 외교관으로 활동했으나 1905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친일파가 되었다. 그는 학부대신으로 ‘이토히로부미’의 지시를 받아 어전회의에서 고종을 협박하여 ‘을사늑약’을 체결하였으며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에 앞장섰다. 또한 1907년 ‘헤이그평화회의’ 사건을 빌미로 고종 퇴위를 강요하였고, 내각총리대신으로 ‘정미7조약’에 서명하여 행정권, 1909년에 ‘기유각서’를 교환하여 사법권을 일본에 넘겼다. 최종적으로는 1910년에 ‘한일병합조약’에 서명하여 일본제국의 주구노릇을 하였다.

일본정부는 ‘경술국치(한일병합)’이후 이완용이 관직을 사퇴하자 백작 작위와 거액의 은사금을 내렸다.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주장한 이완용은 중추원부의장이 되었으며 1919년 3ㆍ1운동이 일어나자 진압 공로로 후작 작위로 승급되었다. 말년에는 조선사편찬위 고문으로 친일사관 정립에도 관여하였으며 1926년 지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화려하고 성대한 장례식은 고종황제의 장례식에 버금갈 정도였다고 하지만 그는 사후에 을사5적, 정미7적, 경술국적으로 불리고 있다.

직계 후손들은 행방불명, 일본으로 밀항하여 귀화, 캐나다 이민 등 많은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견디지 못하고 뿔뿔이 헤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몇 해 전 후손들이 조상 땅을 되찾겠다는 소송을 진행한다는 뜻밖의 소식이 보도되자 공분을 사고 있는 상태다.

이완용, 산골의 묘지도 훼손하는 사람이 많아 화장하고 족보에서 이름도 삭제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매국의 끝은 어디쯤일까?

 
임영주(마산문화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