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영순 (노선생논술학원장)

2015-06-21     경남일보

우리 아버지는 술을 못 하셨다. 어릴 적엔 친구들이 아버지가 술에 취해 용돈을 손에 잡히는 대로 주었노라고 자랑하는 것이 은근히 부러웠다. 우리 아버지도 술을 좀 드시고 큰 소리로 노래도 부르고 과자도 사 오셨으면 하고 바랐다. 한 번도 자식들 앞에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며 귀가 시간은 시계처럼 정확해 미리 대문간에 나가 있어도 틀린 적이 없었다. 겨울이면 두루마기 자락을 허리에 묶고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시던 모습을 지금도 기억한다. 자전거 뒷자리에 앉아 그 넉넉하던 등허리에 팔을 두르면 조금도 춥지 않았다.

아버지는 술뿐만 아니라 담배나 바둑, 그 어느 것 하나 당신만의 취미를 갖지 않으셨다. 그렇다고 아버지의 삶이 건조하고 메마른 것은 아니었다고 기억한다. 비록 술은 못했지만 세상의 멋이나 취미를 모두 지닌 사람처럼 넉넉하게 사셨다. 남편을 만나 아버지 곁을 떠나올 때까지 나는 세상의 모든 것을 당신의 눈으로 보고 생각하고 느끼며 자랐다. 아버지로부터 외모를 비롯한 많은 것을 이어받았지만 풍부한 삶을 살아가는 방법만은 배우지 못했다. 인생을 유유자적 즐기며 사셨던 아버지 곁에서 그 비결을 배웠더라면 지금쯤 내 삶에도 윤기가 흐를 텐데….

나 역시 술을 못한다. 그러나 술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주위에서 술 마시는 사람을 보지 못하고 자라서인지 술을 대하면 은근히 겁부터 나 거부하게 된다. 때로는 나도 술이 마시고 싶다. 좋아하는 커피 두 잔으로도 좀처럼 달래지지 않는 갈증을 느낄 때나, 왠지 억울하고 무엇인가 손해보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술이 그립다

언젠가 아버지께서 술을 드셨더라면 오히려 좋았겠다고 지나가는 말투로 살며시 물어보니 뜻밖의 말씀을 하셨다. “ 술을 못한 게 아니라 안한 것이여. 내가 술을 했다면 너희를 이만큼이나 키울 수 있었겄냐? 아버지는 너희 생각에 술을 입에 댈 수가 없었다.” 남들이 술을 마시며 허비하는 동안 아버지는 자식들이 좋아하는 것과 쉬임없이 다가오는 생일을 기억하기 바쁘셨을 것이다. 당신의 삶은 온통 자식들의 얼굴로 채색되어 자식 하나하나가 차마 마실 수 없었던 술이요, 피우지 못한 담배는 아니었을까.

그런데 왜 나는 아버지가 술을 못 하신다고만 생각했을까? 귀한 술을 선물로 받아도 아버지께 드릴 생각은 한 번도 아니했다. 이제야 좋은 술이 있음을 깨닫건만 아버지는 여기에 안 계신다. 자식은 끝까지 부모의 깊은 속내를 헤아리지 못한다는 옛말을 생각하며 아버지 무덤에 술 한 잔 바치고 싶다.

노영순 (노선생논술학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