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여교장선생님의 사랑이야기

김동환 (경남교육청 과장)

2015-09-17     경남일보
70, 80세대의 젊은이들은 요즘과 달리 순진무구한 친구도 많았다. 연애편지도 미팅도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친구가 있었다. 고시공부를 한다고 여자에게도 눈길을 주지 않았던 친구였는데 나이가 들면서 처음으로 맞선을 보게 됐다.

작은 시골마을이었는데 할머니들이 중매를 선 것이다. 몇 개의 담장 너머에서 같이 자랐고 집안의 어른들도 모두 알고 있으며 색다른 연애감정도 생기기 어려운 그런 상대였다. 가까운 읍내 다방에서 만나서 대화를 나누고 헤어진 후에는 서로 별다른 감정도 없었다. 그런데 마을 할머니들이 아무리 그래도 두세 번은 만나야 된다고 하면서 만남을 재촉했다. 그래서 두 번째 만남을 주선했는데 여자 측에서 만나지 않겠다는 연락이 왔다.

당시만 해도 초등학교 여선생님의 중매시장 가치가 대단히 높았는데 같은 마을에 있으면서 직장도 없고 고시공부를 하는 미래가 불투명한 친구는 어림없다고 할 만한 수준이었다. 거절을 당한 친구는 그때서야 다시 만나야 한다는 다급한 마음이 생겼다. 만남이 성사되지 않자 그 여선생님에 대한 감정이 차츰 그리움으로 변해 사랑으로 급성장했다. 평생의 목표였던 고시공부도 더 이상 가치가 없게 느껴졌다.

편지라고는 쓰지 않았던 친구가 갑자기 나한테 편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긴 장문의 손편지가 하루 걸러 계속 날아왔다. 내용인즉슨 멋진 여인이 나타났는데 그 여인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아도, TV를 보아도 온통 그 여인의 얼굴이 나타나 견디기 어렵고, 심지어 밥을 먹어도 무슨 맛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웃음이 나왔다. 분명히 상사병이었다. 상사병을 눈치챈 어른들이 마을회관에 나가서 그 사실을 의논하는 바람에 소문이 퍼져 그 여선생님이 알게 됐다. 시들어 가는 총각을 살려야겠다는 할머니들의 공동노력으로 드디어 두 번째 만남이 이뤄졌고 넉 달 후 결혼 청첩장을 받게 됐다. 비록 고시 합격은 못했지만 과수원 원장이 된 친구는 아름다운 강변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지금은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이 된 아내와 평생을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다.

요즘도 그 친구는 해질 무렵이면 그 옛날 상사병으로 드러눕게 만들었던 여교장선생님의 퇴근길을 항상 눈 마중을 나가 기다리고 있다.
김동환 (경남교육청 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