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귀신’들과 노래를…

하아무 (한국작가회의 경남지회장)

2015-11-09     경남일보
시마(詩魔)라는 게 있다. 풀자면, 시 귀신이란 말이다. 옛 문인들이 시를 쓰도록 만드는 내부의 알 수 없는 힘을 가진 괴물, 멀쩡한 사람을 홀려 시를 쓰지 못하면 가슴이 뒤집어지고 밤새워 괴로워하다 끝내 절망과 한숨 짓게 만드는 귀신을 빗대어 한 말이다. 시마라는 말은 당나라 시인 백낙천이 처음 사용한 이래 수많은 전설과 야담, 시가, 문장 등에 회자돼 왔다. 고려 때 시인 이규보는 ‘구시마문(驅詩魔文)’에서 시마 때문에 자신이 입은 피해를 일일이 열거했다. 그날 밤 꿈에 시마가 나타나 자기 덕에 이규보가 그동안 문명을 떨치고 출세한 것을 들어 도리어 그를 책망한다. 할 말이 없어진 이규보는 결국 항복하고 그를 받아들인다.

조선 중기의 유몽인은 친구에게 시마를 물리치는 방도를 알려준다. 시세에 따라 적당히 운신하면서 권문세족의 집에 드나들고, 실없이 익살을 떨며 붕당을 짓고, ‘짜건 시건, 굳세건 무디건, 느리건 빠르건 일체 사람의 행동에 따르며 거스름이 없게’ 살라는 것이 그것. 하지만 정작 자신조차 그렇게 하지 못해 시의 포로가 돼 있었으니 지독한 역설인 셈이다. 그후로도 최연, 이황, 이이, 보우 등까지 ‘시 귀신’을 성토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모두들 당대의 문장가로 이름난 이들었거니와 시인 윤동주는 “시인이란 슬픈 천명임을 알면서도 시를 끄적인다”고 고백한 바 있다. 시란 놈이 붙어 병이 든 것이니 ‘시벽(詩癖)’이라 해도 무방하겠다.

‘시 귀신’이든 ‘문학 귀신(文魔)’이든 사람에게 달라붙기 가장 좋은 계절이다. 각종 문학제가 줄을 잇고, 지난 주말에는 진주에서 형평문학제가, 하동에서는 필자가 일하는 평사리문학관에서 준비해온 평사리문학큰잔치가 열렸다. 가뭄 끝에 더없이 반가운 비가 내렸지만 먼길을 달려오기에는 사뭇 힘들고 불편한 날씨였다. 그럼에도 서울, 부산, 광주, 대전 등 각지에서 한걸음에 달려와준 정호승 시인을 비롯한 수많은 시인, 수필가, 소설가들은 말 그대로 시 귀신, 문학 귀신들이었다.

문학행사를 하기 가장 나쁜 날씨였지만 시심에 젖고 시를 노래하기에 가장 맞춤한 날씨이기도 했다. 문학 귀신들은 각자의 작품을 노래하고 그에 맞춰 춤을 췄고, 흥에 겨워 밤을 도와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들의 노래는 빗소리와 박자가 착착 맞았고, 춤은 단풍을 더욱 상기시켰다. 이렇게 우리의 가을은 깊어간다.
 
하아무 (한국작가회의 경남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