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융희의 디카시로 여는 아침]호우시절

2015-11-11     경남일보
 

 

[천융희의 디카시로 여는 아침]호우시절


빗방울 하나가 바닥을 칠 때

아픈 것들은 아픈 것들끼리

떨어지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부둥켜안는다

더 이상 내려갈 곳 없을 때까지

모두가 평등해질 때까지



-이기영(시인)



삶에 있어서는 역시 바닥론(論)이다. 더군다나 이번엔 계단 바닥이다. 작달비 오는 날, 찻집인 듯한 계단이 시인의 렌즈에 마치 국지성 호우를 만난 듯한 상황으로 포착된다. 빗방울 하나로 시작된 화자의 사유가 파편으로 멈춰 필사적으로 견디며 오르내리는 우리 세상살이를 집중하는 것이다. 통째 바닥을 쳐본 사람이라면 평등이라는 화두에까지 이른 시의 정면에 속이 조금이나마 환해졌겠다.

와중 시의 제목에서 허진호 감독의 영화 ‘호우시절’이 생각난다. ‘때를 알고 내리는 좋은 비’라는 뜻으로 두보의 시 ‘춘야희우(春夜喜雨)의 ‘호우지시절(好雨知時節)’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니까 가뭄에 비든, 다시 찾아올 사랑이든, 너머 평등이든…. 가슴 설레는 소식이나 있어라./ 천융희 《시와경계》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