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3 (33)

2015-11-24     경남일보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3 (33)

“병들면 인생이 끝장난다고 하지만 나 같은 인생을 위해서는 병이 꼭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닌 거 있지(이 말을 하면서 그녀는 떫은 미소를 흘렸다) 그리고 젊음이, 아니 내가 여자라는 것이 그렇게 가치 있는 것인지, 그때 확실히 깨달았다. 생명을 연장시키고 건강을 되찾고 싶은 영감이 자기 재산을 뚝 잘라서 내 젊음을 샀거든. 옛날 영화 같은데 보면 나이 많은 대감이 동첩을 들이거나 나 어린 여자 애들을 상대로 돈 많은 사장들이 오입을 하거나 하잖아. 뭘 모를 때는 불여우 같다고 계집애 욕을 하고 짐승같다면서 남자들 욕을 했는데 그런 놀이가 그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나를 구하는 구세주가 될 줄 어떻게 알았겠니. 나도 버러지처럼 일만 하다 죽느니 사람답게 한번 살아보고 싶었어. 좋은 집에서 고급 옷을 입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하인도 부려보고 싶었어. 단지 병든 노인을 남이 아니라 내가 버릴 수 없는 식구 중 누구라고 바꿔 생각하고 휠체어를 밀어주고 드라이브를 시켜주며 그가 어르는 대로 인형처럼 천진스럽게 같이 놀아주며····(명자언니는 이때 잠시 눈을 감고 말을 끊었다) 나를 택한 그들의 요구대로 나는 응했어. 어차피 각오한 일,(명자언니는 유난히 힘주어서 각오란 단어를 발음했다) 영감이 백 살을 산다해도 이십오 년, 어디서건 죽도록 일을 해야 하는 건 내 운명인데 이것도 일이다. 아주 비싼 일당을 받는데 그 정도야 못 이겨내랴. 결론은 간단했다. 바꿔 말해서 내 젊음을 파는 댓가였지만 나는 서슴치 않았다. 베 짜는 기술이라면 서로 끌어가려는 최고의 기술자였지만 어디서 그런 일당을 받아보았니…. 나는 우리아버지 큰딸이잖니.(큰딸이라는 그녀의 비음 섞인 강조는 몹시 비장감을 싣고 울려왔다) 너도 알잖니. 우리아버지가 어떻게 살았는지. 불쌍한 우리아버지한테 보답하고 싶었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딸자식이라고 남들은 그랬지만 너도 알다시피 우리 아버지는 목숨처럼 끔찍히 우리를 사랑했잖아”

명자언니 말대로 딸의 뜻이 보은으로 그녀의 아버지에게 전달되지는 못했다. 딸이 보낸 돈으로 새 집을 지어 가구도 신식으로 일습을 갖춰 넣었고 냉장고 속에는 고기며 술이며 먹을 게 잔뜩 들어 있으며 금단추 달린 비단 마고자를 입고 푹신한 요이부자리에서 백만장자처럼 여유 있는 생활을 누린다던 명자언니 아버지는 갑작스러운 생활의 변화를 수용하지 못하고 풍을 맞아 고생하다가 다섯 해만에 세상을 떠났다. 잘 먹고 잘 입고, 남들이 말하듯 걱정 없이 사는데도 병주머니가 된 영감을 위해 당골네인 명자언니 어머니는 양의 건 한의 건 좋다는 방법은 다 동원을 했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다. ‘복 없는 인간은 몽당중의가 세 개면 죽는다’던 옛말이 명자언니 아버지를 두고 사람들 입에 한참 실려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