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4 (38)

2015-11-29     경남일보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4막 (38)

‘영리한 사람 제 꾀에 제 무덤 판다’ 던 누군가의 말을 떠올렸다. 나는 그럼 영리한 사람인가. 그건 잘 모르겠다. 그러나 영리한 척했던 것만은 사실이다. 내내 머릿속에 재고 있었던 명자언니 남매의 모습이 상기되었다. 내가 그들을 적수로 삼았던가?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꼭 그들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나보다 나은 모든 사람들은 모두 다 내가 극복해야 될 목표였다. 소리 내어 중얼거리며 양지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늘 이랬다. 정남의 죽음 이후 하루도 분명한 날이 없었다. 안개가 낀 듯 머릿속은 희미했고 일에 대한 의욕이며 앞날의 비전이 전혀 바로 보이지 않았다. 명자의 비아냥거림대로 ‘까짓 것도 출세한 것’이라고 그런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양지 자신도 안 해본 게 아니었다. 새 사옥으로 이사를 하고 ‘기획실장’이라는 명패가 책상에 놓이자 양지는 제일 먼저 명자언니를 떠올렸고 그녀와 키 재기를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리고 불가항력적인 높이에 질려 서서히 졸아드는 자신을 인지했다. 자신이 보이지 않는 자신에게 던지는 아픈 질문을 들었다. 너는 고작 명자와의 동등한 위치 확보를 위해 오늘까지 살아왔는가. 그렇지는 않다고 자신의 노리가 부인하는 힘찬 목소리를 들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 때문에 돈을 벌고 학력을 높이고 출세 지향적인 삶을 추구하고 있는가. 여자 나이 서른 중반이면 결혼은 물론이고 아들이든 딸이든 출산도 마쳤을 것이며 학부형이 되어있을 나이다. 그런데 나는 무언가. 왜 무엇 때문에 나의 뇌리 속에는 악귀의 혼령과도 같은 모진 영혼이 자리 잡고 나날을 고통과 투쟁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나를 조종하며 옭아매는가.

양지는 요즘 성격에 맞지도 않는 희한한 번민에서 자맥질하며 자신의 영혼이 하루하루 풀이 죽어가고 있음을 느꼈다. 어제 저녁만 해도 그렇다. 못 먹는 술로 자신을 가학할 것이 아니라 떳떳하고 당당하게 선대의 잘잘못을 인정하고 그들 명자네의 오늘을 치하하는 아량을 보였어야 옳았다. 그런데 자신은 명자언니의 다녀가라는 전화를 무시한 채 혼자서 술을 마셨다. 맛도 없고 쓰디쓴 소주를 기를 쓰고 마셨다. 따라 잡을 수 없이 먼 곳 높은 위치로 자리바꿈한 그들을 속으로 부러워하면서. 다시 생각하니 죽이고 싶도록 자신이 밉고 창피스러워 쥐구멍이라도 찾아들고 싶었다.

양지는 문득 호흡을 가누었다. 다시 생각하니 끝까지 술만 마신 건 아니었다. 그런데 아무 것도 생각나는 게 없었다. 반짝 떠올랐다가 두서없이 명멸하는 이즈음의 일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