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10월1일 3면, 3일 3면 '장지연선생'

2016-10-05     박은정

장지연 선생 묘비 제막(1967년 10월1일 3면·3일 3면)

마산 현동에 있는 장지연 선생의 묘소를 새단장하고 묘비 제막식을 거행한다는 기사가 실려있다. 전국의 언론인 정성을 한데 성금 75만여원으로 묘소개축까지 완공했다는 내용으로 3일에는 묘소까지의 약도도 상세히 나와 있다.
위암 장지연은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11월 20일자에 항일논설 ‘시일야방성대곡’을 써 일본의 국권침탈을 규탄하고 국민총궐기를 호소했다. 이 일로 위암은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65일간 투옥되었으며, 황성신문은 11월 20일자가 압수되고, 1906년 2월 12일까지 정간당한다. 
장지연은 1909년 10월 창간된 최초의 지방신문 ‘경남일보’의 주필로 초빙되어 1911년 10월 진주로 거처를 옮겼다. 
그후 경남일보는 1910년 10월 11일자에 한일합방을 비난하며 자결한 매천 황현의 절명시를 게재해 신문지법 제21조 위반으로 10월 25일까지 10일간 정간됐다.
장지연은 1913년 신병을 이유로 경남일보 주필을 그만둔 뒤 마산으로 이주해 1921년 10월 2일 사망했다.  편집팀 박은정